[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벽화의 史的 고찰 (4) 지중해 연안의 벽화
[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벽화의 史的 고찰 (4) 지중해 연안의 벽화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4.03.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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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서울대 초대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
(4) 지중해 연안의 벽화
발상민족이 분명치 않은 BC.3000~1100년경의 Aege벽화는 Egypt와 같이 남성은 적색, 여성은 황색계의 육색(肉色) 표현을 했으며 궁전 내벽은 전부 채색되었으나 화면 주제는 Creece人의 생활상인 투우ㆍ행열ㆍ의식 장면 또는 화훼ㆍ조류ㆍ야수ㆍ어류ㆍ해상생활 등이다. 확실한 fresco 기법을 썼으며 남성 공통으로 등신대의 훤칠한 신장 표현과 요부(腰部)의 과장된 수세적 표현을 했다.

Knossos fresco의 「cup을 들고 가는 사람」착색정조(relief fresco)인 「王子」「司祭宮圖(가제궁도)」(BC. 1500년경 Candia Museum) 등에 잘 나타나 있다. Egypt fresco와 類似히 側面上에 側面下肢, 正面上에 正面眼眉, 正面胸部가 表現됐다. 도시적 배경 처리와 배경과 인물의 색상채도 차를 높여 volume을 주려 했다.

knossos의 복원된 소성소의 군중 frescosms 두부의 누적된 표현과 기하학적 수직선으로 원근과 공간 구성의 세련미를 보여준다. 냉정한 형식적 전통에서 떠나 생명감이 있고 의식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부분적 가벼운 정조(淨彫)는 음영법을 구사치 못한 fresco에 volume 효과를 주고 있다.

Egypt와 유사하면서도 탄력성과 개성이 충일한 화법이며 특히 「투우도」는 극적 운동감의 탁월한 표현을 보여주며 자연 광경에서는 자연에 대한 이해, 사랑, 상상과 자연적 표현을 보여준다.

동양화 백묘기법과 유사한 Candia Museum의 「비어도」는 자유롭고 눈유(嫩柔) 한 운동과 반사적 운동이 암초와 단기의 급격한 율과 결합하여 물의 간접 표현을 잘 나타냈으며 감청색, 황색, 갈색을 주로 한 문인화적 자유분방한 composition이다. Egypt의 반복성에 비해 부단의 변화와 색채구성의 활동성과 변이성, Crete 해왕의 열성, 불안정성, 모험성의 반영으로 보인다.

(5) 희랍의 벽화
Archaic시대는 정기왕성한 육성기로 작가는 자기 소재를 대담호방하게 실험했으며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한 장중하고 기념비적 표현이었다. Classic시대에는 Archaic기의 조야성과 전통성을 보유하면서 비례감각이 세련되었고 자연주의로 전통적 형태를 조화[시켜 절제있고 정온한 율동의 예술을 출현시켰다.

동부 지중해나 서부 아세아와 같이 다색채(polychrome) 건물에 조화시키기 위해 조각상에도 비사실적이며 전통적 수법으로 자연석 색채가 아닌 적ㆍ청ㆍ녹ㆍ황ㆍ흑색 그리고 약간 금분 기미가 있는 화려한 색으로 착색했다. 착색 않은 곳은 밀랍으로 밀착시켜 연마한 듯하다.

건축물, 조각상, 벽화를 유기적 관련성 아래 표출한 때문에 건물외벽 채색이나 목각 착색도 fresco나 tempera양식을 사용한 것으로 본다. 희랍벽화는 완전 소멸되어 도기 표면 장식화나 목조각 착색과 라마인의 모작품에 의해 연구할 수밖에 없다. 해부학적 세부가 평면상에 명료치는 않으나 다른 부분과 충분히 연결될 정도로 표현했으며 반곡선의 댕기와 배후의 두발이 대담한 구도를 보여주며 운동감을 보충해 준다.

조각가이며 벽화가인 Polygnotus와 Phideas 등이 활약했으며 Polygnotus는 벽화의 상을 상부와 하부에 대치해 심도를 표현하려 했으며 극히 국한된 색채를 썼다. 신전건축에서의 숭고하고 monumental함을 벽화에 구현 시켰으리라 여겨진다.

BC. 500년경의 벽화가 Apollodorus는 volume표현을 위해 음영표현을 시도한 듯하며 shadow-maker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당시 일반적 자연주의적 경향과 부합된다. 당시 Athenes에서 발전한 회화 유파들은 도기 장식화에 주요한 영향력을 주었으며, 방형?구형의 화면 위에 인물상의 배치법을 연구했다. 따라서 도기 장식화가 벽화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6) Hellenism 벽화
Hellenism時代와 BC.4C에도 5C와 같이 찬란한 화파가 있었음을 건축과 조상(彫像)에 미루어 볼 수 있겠으나 현존하는 작품이 없어 확실치는 못하다. 명담 중에 5~4C의 Zeuxis와 Parrhasius, Alexander시대의 Apelles와 Protogenes 등이 기교의 숙련과 사실주의적 표현을 강조한 벽화 작가라는 것이 전해진다.

희랍의 벽화가들은 원근법, 음영법과 단조로운 색채를 시도했으나 그 중에 동양화의 고고유사묘법(高古游絲描法)과 같은 선묘법이 가장 탁월한 표현 방법이었다. Naples Museum의 BC. 100년경 Alexander mosaic은 Alexander와 Darius의 전쟁 광경인데 희랍 회화를 Rome작가가 전이 모사한 것 같으며 mosaic 기교를 짐작한다 해도 희랍벽화의 대규모적 구도를 규지할 만하다.

당시 벽화는 volume과 공간성을 추구한 듯하며 시각적 감각을 모방하는 희랍미술이 근동에 전파되어 동방문화와 혼합돼 수세기 후에는 Byzantine미술로 개화하게 되었다.

1606年 Rome에서 발견되어 최초의 추기경 Aldobrandini의 소유가 되어 그의 이름을 딴 바티칸 Museum의 Nozze Aldobrandini라고 알려진 「혼례식」묘사의 벽화도 모사된 것으로 보이나 원작의 우수성을 짐작케 한다. mosaic 모방 작품으로 Naples에 있는 「Issus전쟁도」가 가장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됐으며, 납화법으로 제작된 사실적 초상화가 London의 국립화랑에 있다.

(7) Etruria와 Rome의 벽화
Rome에게 BC.283年 정복되기 전 4세기간의 가벽의 전당에서 Etruria미술을 연구할 수 있는데, 대개 희랍벽화의 전승이나 모방이며 토착성 있는 유파도 있었다. 그 중 국민성을 잘 묘사한 벽화로 Vulci지방의 Francois(19C전반 Etruria미술을 발굴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임) 분묘의 fresco벽화가 있다. Achilles가 Patroclus의 원혼을 위해 트로이 포로를 희생물로 봉헌하는 내용이며 제재에는 희랍적 요소가 보이나 제작 수법은 완전한 Etruria식이다. 이런 양식은 18C후의 Padua의 Mantegna벽화, Orrieto의 Signorelli벽화에서와 같이 확고한 힘과 정확성을 표현하고 있다.

분묘 천장은 주로 전통적인 기하학적 문양으로 벽은 장례식?무용?운동경기 등으로 묘사했는데 순전한 장식적 구성과 fresco기법을 썼다. 석면 위에 직접 그린 조지 벽화도 있으며 고명도의 원색으로 자연색을 고려치 않고 전통적 수법으로 부채했다.

BC. 5C頃 Leopards분묘 벽화도 실물에 의한 수류부(隨類賦) 하지 않았고 같은 수법의 BC. 5C초의 Triclinium분묘 벽화인 「피리 부는 사람」은 단순 솔직한 전통적 수법으로 내적 생명력의 율동감각을 객관적 형태로 표현했다. 균열, 탈색 현상이 비교적 없으며 인물 양편의 수목이 장식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했다.

Rome fresco는 단순한 희랍 벽화의 연속이 아니며 그것과 병행한 1세기 중엽 이래의 독창적 Pompeii양식은 그 시작이 Rome인지 알렉산드라인지 확실치 않으나 Pompeii와 herculaneum에서 발견된 것은 모두 fresco방법이며, Pompeii벽화는 석고를 두껍게 해 습기를 오래 유임시켜 작가가 여유있는 제작을 한 듯하다.

밝은 색채의 인상파 화풍과 유사한 기법으로 광선과 색채 반점을 많이 사용했고 적색과 흑색은 화판과 인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유백색 윤곽을 둘렀다. Rome人은 벽화 표면을 특별히 시공하여 찬란한 벽면 효과를 얻었으며, 그 위에 건물 외양같은 착각을 하도록 원주와 창틀 표면에 원근법에 의한 투시도적 선을 둘러 부각처럼 보이게 했으며 중앙에 대폭의 회화, 측면 건축 세부에 거리감과 양감의 풍경화를 둔 구조를 썼다.

Pompeii근처인 Villa Item (신비의 별장)의 fresco 중에는 평면적 감각을 없애고 부각 효과를 노려 화면 인물이 얕은 공간 위에서 부조적 율동감을 갖도록 표현한 것이 있으며, 배경은 인물보다 어둡게 했고 인물 구성의 격별한 파악력과 인접 인물과의 유기적 관계의 경영 위치에 비범한 독창성을 보여주며, 여인 나상은 표정적 인물 묘법과 음양 사용으로 volume을 표현하고 건축적 구조를 암시하여 전통적 선의 기법에서 보다 표피적 효과와 육감적 분위기를 맛보게 한다.

Villa of Livia의 풍경화 fresco는 실내 측면이 정원을 향해 개방된 듯한 착각을 주는데, 이는 Rome人이 사실적 조각을 애호한 것과 같이 대자연의 일부를 실내-일상생활로 유인하고자 하는 결과이다. Rome의 Rospigliosi 구락부의 벽화 「사다리를 가진 사랑의 신」은 Fragonard의 작품처럼 자유분방하다.

Roman Rresco는 동양적 요소에 의해 변이된 헬레네스틱 미술과 고전적 전설과의 회고적 진보이며 전통을 고수했으나 결국 Byzanntine미술에 융합되었다.

이러한 퇴폐적 화풍과 병행하여 그리스도 사후 1세기경 Rome 고유의 독창적 사실주의인 Roman Art가 생겨, 두 가지 반대 화풍이 중세기까지 병존했다. Byzantium이 오랫동안 서구에 만연하고 Italy 사실주의는 14C에 France 사실주의와 접촉하여 승리한 결과로 Renaissance벽화가 된 것이다. Pompeii와 Herculaneum벽화를 제외하면 Rome에는 극소수분으로 보존된 것이 거의 없고 모작이거나 대부분 희랍 화가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통을 따른 제작으로 본다.

구도의 웅대성, 평은감 이외에 원근법과 명암, 투영 용법과 인물, 배경, 건축물의 통일성 등이 보이고 벽면의 광활성과 벽질의 돈후성(敦厚性) 이외에 원색조의 변조법과 표면 처리법이 발달했으며, 벽화 제작 취지는 장식성보다 실질적 활용성이 우세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