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였다" -얀 루프 오헤른
"우린 '위안부'가 아닌 '성노예'였다" -얀 루프 오헤른
  • 심재진 디자인전문기자 전 서울디자인재단 대표
  • 승인 2014.04.02 1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엇을 '위안'했단 말인가? 누구를 '위안'했다는 말인가? 왜 우리는 그들을 '위안'하지 못하는가?

▲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LG전자 디자인연구소장
오스트렐리아의 91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나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성노예'였다."라고 울부짖고 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역시 "그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불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모든 신문기사,방송 뉴스는 '위안부','일본군 위안부'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 심지어는 '위안부 할머니'라고 까지 말하는 몰지각함을 보이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당시의 소위 '위안부','일본군 위안부'를 우리는 얼마나 '위안'해 주고 있는가?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위안부 할머니','일본군 위안부'라고 제목으로 쓰고 있는 이 말! 이 말은 당사자인 할머니들을 얼마나 치욕스럽고 비정하게 욕하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왜 그분들이 '위안부','일본군 위안부'란 말인가? 일본정부와 일본언론은 '일본군 위안부'라고 하는 말을 부지불식간 언론을 이용하여 세간에 퍼뜨리고 있으며 우리를 상대로 전략적으로 여론 물타기하는 행태를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꼭두각시 노름에 따름 놀아 나고 있다.

무엇보다 '위안부 할머니','일본군 위안부'라는 말을 아무 의식 없이 언론에 사용하고 있는 지각없고 역사의식 없는 국내언론은 크게 자각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실제로 일본군을 따라 다니며 돈 벌 목적으로 매춘을 했던 포주와 매춘부를 지칭하는 말이며 일본제국군대의 전장을 따라 다니던 그들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일본군 성노예' 소녀상

그래서 일본정부 총리와 관리들은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성이 없었던 자발적인 소위 성을 군인들에게 팔던 매춘업자와 매춘종사자들이다." "한국정부와 한국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라고 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강점기 때 강제 연행되어 꽃다운 청춘을 빼앗겨 버린 그 할머니들을 향해 일본정부는 할머니들이 일본정부로부터 돈을 받을 목적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심리적,전략적 농간에 넘어가고 있는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이제부터라도 '일본제국군대(강제동원)성노예자'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군대'라고 하지말고 '일본제국군대'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만이 그 시대를 분명히 할 수 있고 더 이상 그들의 언어적 농간에 놀아 나지 않게 된다.

한 때는 일본제국주의자와 일본정부는 이들을 '일본군 정신대'로 지칭하며 제국군대를 후방에서 지원하며 심지어 전장까지 따라 가서 봉사하는 민간인으로써 자신의 몸을 바쳐가며 충성한다는 의미를 바탕에 깐 일본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요 애국자로 포장하기도 했다. 당사자인 할머니들은 살아 생전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이제 몇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대가 되는 일본정부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치미를 뗄 수 있는 빌미가 '위안부','일본군 위안부'라는 소위 명칭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제국군대(강제 동원) 성노예자'라고 그들을 정확히 지칭하고 불러 주면서 일본정부의 농간에 놀아 나지 않고 그 분들의 가슴에 못을 더 이상 박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분들의 인권을 위해 그냥 '위안부','일본군위안부'라고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 놓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올해 84세인 어머니의 말씀이 "그 때 동네에 트럭이 들어 오기만 하면 지나가는 처녀들을 차에 억지로 태워 가는 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래서 너네 외할아버지가 18살 나를 시집을 보냈지! 그래서 너희들이 태어났지” 만약 그 때 어머니가 운 나쁘게 트럭에 끌려 가셨다면 나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냥 운 나쁜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과거와 현재를 살아 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의 역사이며 물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피 맺힌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우리 역사를 바르게 표기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만큼 훗날 우리의 미래와 국익에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LG전자 디자인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