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찜 박물관론
동태찜 박물관론
  • 윤태석 뮤지엄 칼럼니스트
  • 승인 2014.04.06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태석 뮤지엄 칼럼니스트/문화학 박사/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한국박물관학회 이사/한국박물관교육학회 이사              
‘노인이 죽으면 박물관 몇 개가 사라진다.’는 영국속담이 있다.

또한 프랑스의 대문호 프루스트(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Remembrance of Things Past)』에서 ‘한사람이 죽을 때 하나의 세계가 없어지는 거다.’, ‘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지극히 인문학적인 표현으로 한 개체의 시각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며, 개개인이 곧 우주요 세상의 모든 중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죽음은 그것과 동시에 한 생애의 편린도,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인 기억의 수장고도......, 망자와 함께했던 생활사적 유물도 그리고 관계의 인류학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박물관이며 스토리텔러로 박물관적 요소의 집합체이다. 1,400g 정도인 뇌의 전두엽, 측두엽, 해마, 뉴런 등은 수장고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 Control Process Unit)이며 기억이라는 형식을 빌어 실로 엄청난 양의 소장품을 수장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관리, 연구, 조사도 담당한다. 그것들은 역사, 자연, 종교, 예술, 전쟁, 생활사 등 나열하기조차 힘들만큼의 양과 질을 담보한다. 이를 끄집어내어 유형(有形)과 무형화(「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서 정하는 무형의 기준: 부호, 문자, 음성, 음향, 영상 등으로 표현된 자료나 정보)할 수 만 있다면 바티칸이나 브리티시, 에르미타슈와 같은 박물관 수십 개는 족히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박물관의 수준은 소장품의 양과 질이 결정함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소장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박물관의 기능과 가치재(Merit goods)로서의 품격을 결정하게 된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천수를 누리며 특정분야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덕망가라면 소장품의 질은 물론 양 또한 그와 비례할 것이다.

한 개체로서 육신는 물론 성격, 기억, 학습, 인성, 버릇과 같이 정신?심리학적 요소까지 더한다면 박물관적 요소는 더욱 풍성해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수정 원석같이 고졸(古拙)한 수장고. 그 깊숙한 곳에 잘 정제된 소장품......, 아직도 멈추지 않는 수집증으로 진귀한 보물을 찾아 열정을 불사르는 삶. 이 살아있는 박물관론자들이 펼쳐놓는 박물관론을 들을 수 있는 모임이 있다.

모임의 주체는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떠도는 숱한 유무형의 자료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감식안을 키우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 중 몇몇은 향후 멘토로 초대된 박물관론자들의 대열에 편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결코 무리는 아닐 듯싶다.

박물관론자들의 총책은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이하 김회장)이다. 김회장은 이어령, 신봉승, 고은, 이종상, 김홍신, 박재동, 손숙, 이배용, 최불암, 임권택, 김상현, 박정자, 신달자, 손진책 등 각계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초청해 준다. 일종의 거간꾼인 셈이다.

이들은 소박한 동태찜집에서 박물관론을 펼쳐놓는다. 조선왕조 오백년, 삼국유사, 한비자의 법가사상과 샤르트르를 말하기도하지만 박물관론 인사들이 직접 창작하고 참여한 시와 극, 영화와 무대, 음율과 미술 등을 담박하게 풀어 놓기도 하고, 음식상을 무대삼아 즉흥해서 표현하기도하며, 박정자나 손숙, 손진책과 같은 이들은 극장에서 직접 행위로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청중을 더 감칠맛 나게 하는 것은 한 겹 한 겹 풀어헤쳐놓는 지혜의 퇴적층에 있다. 동태찜이 달콤하고 감미롭기까지 해지는 순간이다.

이들의 말과 동작은 한마디로 말해 박물의 전 영역인 역사·고고(考古)·인류·민속·예술·동물·식물·광물·과학·기술·산업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박물관의 제(諸) 기능을 격식 없이 논하고 있다. 이 순간은 박물관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문화·예술·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증진의 목표를 대입하는 것은 차라리 저급하기까지 하다. 이들의 얘기(論)는 푹 과진 동태찜 앞에서 발라낼 뼈조차도 없이 걸죽하다.

박물관의 박물은 ‘방물장수’에서 온 말로 방물은 박물(博物)과 같은 의미이다. 식민지 농촌사회의 고통과 그 붕괴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박노갑(1905~1951)의 소설 『마을의 이동』을 보면 ‘하루는 어떤 방물장사 늙은이가 정말 중매를 들지 않었겠어요. 원수를 나에게 중매한 건 이 방물장사 늙은이였지요. 그러나 나는 방물장사 늙은이를 구태여 원망은 말기로 하였지요. 박물장사의 수단은 내 맘 빈틈을 탔으니요.’라는 대목이 있다.

이렇듯 ‘방물장수’는 방물‘장사’로 또는 ‘박물’장사로도 불리었다. 이들의 노정은 온갖 물건이 그득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시골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데 있었지만 중매 등 사람의 빈틈 즉 아픈 마음이나 긴요한 민원을 어루만져 주는 데도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김회장의 역할이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태찜집 모임도 여기에 가치가 더 있다.

큰 틀에서는 온고지신을 지향하지만 될 성싶은 이들에게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일과 짝짓기를 해주기도하고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맺어주기도 한다. ‘넝쿨나무도 거목 옆에 있으면 타고 올라간다.’는 김회장의 거목 론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매월 첫날 평창동 동태찜집 앞에는 허기진 입맛을 돋게 하는 동태찜 냄새보다 사람의 향이 더 진동한다. 인문학의 주방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박물관은 바로 이런 곳이다. 실물이 직관으로 변하고 그 직관은 사람에 의해 정리되며 발현된다. 이번 정부는 산업과 자본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던 그간의 발전논리의 한계를 직감하고 인문학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사람중심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나주배박물관의 등록취소나 정치 쟁점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의 사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앞서 박물관의 인문학적 역할과 기능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답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형식과 자본의 논리, 영혼이 없는 박물관자료와 활동은 더 이상 미래의 박물관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님을 동태찜 박물관론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월의 첫날은 아직 멀었지만 동태찜집 앞을 자꾸 서성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