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2014 박명숙의 춤 , ‘낙화유수’ 혹은 ‘수류화개?’
[이근수의 무용평론]2014 박명숙의 춤 , ‘낙화유수’ 혹은 ‘수류화개?’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4.04.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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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거치면서 박명숙처럼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펼쳐온 무용가는 드물 것이다.

‘황조가’ ‘그날새벽’ ‘고구려의 불꽃’ 등 고구려연작을 발표한 1980년대를 무용가로서의 성숙기라 본다면 ‘혼자 눈뜨는 아침(1993)’, ‘에미(1996)’, ‘유랑(1998)’을 통해 강인한 여성상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각인시켜준 1990년대는 개화기라 할 수 있다.

서정성과 연극성, 여성성으로 특징지어진 그의 춤 캐릭터가 “탐미적 서정의 춤 메신저”란 이름을 획득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일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특징이 엷어지며 춤의 주제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으로 확산된다. ‘바람의 정원(2008)’, ‘윤무(2011)’, ‘황금가지(2013)’ 등이 그 이후의 작품들이다.

2014년 신작인 ‘낙화유수’(4,11~12, 대학로 예술극장, 90분)는 ‘에미’와 ‘유랑’, ‘바람의 정원’을 한데 묶어 한 무대에서 선보이는 실험성을 지녔다. 1990년대 이후 무릎 부상으로 무대에 서지 못했던 박명숙이 직접 주역을 맡으면서 관객들의 기대를 증폭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객석과 무대, 벽면의 스크린 등 무대는 3중의 구조로 시작된다. 가면을 쓴 노파(박명숙)가 객석 맨 앞자리에서 “애들아, 너희들 거기 있냐?”란 말로서 무대를 열어젖힌다.

무대 위에는 ‘유랑’의 하이라이트인 흰 새들의 춤이 펼쳐지고 뒷벽 스크린에는 ‘바람의 정원’에서 보였던 도시풍경이 그려진다. 노파가 무대로 올라가며 무대는 몇 개의 지역으로 분할된다. 낯익은 ‘에미’의 주제음악을 배경으로 보따리를 든 여인들이 행진하고 자전거 탄 소녀와 한 쪽 구석에서 힘들게 노구를 지탱하고 있는 노파가 보인다.

장대를 들어 메고 한 줄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지친 행렬과 설원에서 펼쳐지는 흰 새 들의 춤은 ‘유랑’의 장면이다. ‘바람의 정원’에서 보았던 우산을 든 여인, 부딪치고 깨지고 밀어내는 어지러운 세상, 가면을 쓴 환자들이 들끓는 타락한 사회의 모습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무대를 채운다.

가난한 노파와 함께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도 공존한다. 하늘에서 달걀이 쏟아져 내리고 횃대에 앉은 암탉들은 쉬지 않고 계란을 생산한다.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숲에선 날개 편 나비들이 날아오른다. 나비는 죽은 자의 영혼이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계절마다 색깔을 갈아입는 숲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무대가 비좁아질 정도로 숨 가쁘게 전개되는 다양한 장면들, 그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간격을 감초처럼 등장하는 노파의 넋두리가 연결해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하면서도 노파는 걱정이 많다. “느그들, 뒤 밭에 좀 나가봐라. 넘어진 옥수수 대는 일으켜 세우고 세 개씩 모아서 묶어줘라”. “아가, 자냐? 텃밭에 무씨는 뿌렸냐? 내가 무씨를 뿌리면 무청이 자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육성으로 대사를 외우며 박명숙은 <봄날이 간다>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넋두리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옥수수, 텃밭, 무우와 무청, 울창한 수풀과 나비들은 자연의 모습이다. 흙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과 박명숙이 추구하는 여성성은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이것이 ‘낙화유수’의 주제다.

‘유랑’에서 관객들의 가슴을 적셔 주던 <불라디미르 임>의 슬픈 노래와 귀 익은 가곡들을 이 작품에서는 들을 수 없다.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효과음들이 음악을 대신한다. 임신한 여인을 통해 ‘에미’에서 보여주던 생명의 탄생과 윤회에 대한 희망도 찾기 어렵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울창한 숲속에 날아오르는 수많은 나비 떼가 그나마 박명숙 작품의 서정성을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다. 한 때 박명숙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서정성과 연극성이 서사적인 장면나열식으로 바뀌면서 그리움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쉽다. 앞의 세 작품을 보지 못한 관객들이 이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여성성이란 주제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연합을 시도한 세 작품 중 ‘바람의 정원’ 대신 ‘혼자 눈뜨는 아침’을 포함시키면 어땠을까. “꽃잎은 떨어지고 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는 뜻을 가진 ‘낙화유수(落花流水)’란 신파적인 제명은 상투적이다. 오히려 ‘수류화개(水流花開)’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물은 흐르고 꽃은 또다시 핀다.”는 뜻이다. 박명숙의 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