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유니버설발레단과 나초 두아토의 만남
[이근수의 무용평론]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유니버설발레단과 나초 두아토의 만남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4.05.1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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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세월호의 애도분위기가 무대로 전염된 탓일까. 18명 무용수들이 하나같이 침울하고 무표정이다. 조명은 어둡고 의상 역시 온통 검은색이다. 나초 두아토(Nacho Duato; 1957~)가 유니버설발레단의 초청을 받아 직접 안무한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 Forms of Silence and Emptiness; 4.25~27, LG아트센터)의 마지막 날 공연무대의 인상이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서거 25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원작을 유니버설발레단(문훈숙)이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선정한 것이다. 바로크시대 바흐의 음악세계를 춤으로 풀어내고 말년에 닥쳐온 바흐의 실명과 불운을 담은 작품이기에 우울함은 예정된 것일 수도 있고 세월호 트라우마란 범국민적 분위기에는 어울리는 작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연은 1,2부로 나누어 진행된다. 문훈숙의 해설과 15분의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모두 120분 공연이다. 1부는 13개의 에피소드가 바흐음악을 배경으로 차례로 보여진다. 춤은 각각 독립적이다. 칸타타, 무반주 첼로모음곡, 브란덴부르크협주곡과 다양한 악기를 위한 협주곡, 바이올린소나타 등을 두아토의 현대적 춤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짧은 검정색 체조복차림으로 의상을 통일한 무용수들이 두명, 세명, 여섯명 혹은 18명 군무로 다양한 무브먼트를 보여준다. 객원 발레리노 예브게니 키사무디노프(바흐)의 지휘로 무용수들의 몸이 관현악기가 되어 연주하는 프롤로그장면은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불러일으킨다. 수석무용수 김나은의 몸이 첼로가 되어 연주자의 활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춤 아이디어 역시 신선하다.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어둡고 우울한 가운데도 1부의 춤들은 다양하고 기교적이다. 그러나 무용수들이 체조선수들처럼 익숙한 동작으로 기계적인 무브먼트를 보여줄 뿐, 감정이 이입되지 않은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2부엔 ‘침묵과 공(空)의 형상’이란 별도의 제목이 붙어 있다. 1부가 바흐음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면 2부는 바이마르에서의 10년과 라이프치히에서의 20여년 음악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후의 삶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합창곡과 아리아, 바흐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음악형식인 푸가(Fugue)의 기법이 배경을 이루는 춤은 종교적인 엄숙함과 장중함이 돋보인다. 그가 작곡한 많은 작품들이 생존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한데다가 두 부인으로부터 얻은 스무 명의 자녀들을 부양하며 시력까지 잃은 불행한 말년의 모습이 어둡게 그려진다. 2부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푸가기법 (BWV 1080)이 연주되는 피날레장면이다. 무용수들이 한발 한발 계단을 걸어올라 오선지에 하나씩의 음표를 그린다. ‘라 바야데르’에서의 아라베스크 군무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라 바야데르의 피날레에서 백색의 발레리나들이 언덕에서 길을 따라 하강하여 네 줄의 행렬을 만드는데 비해 검은 옷의 무용수들이 아래로부터 한 발짝씩 계단을 걸어올라 5선지 악보를 완성하는 모습이 차이점이었다. 

나초 두아토는 스페인출신의 대표적인 현대무용안무가다. 네델란드댄스시어터(NDT)에서 이어리 킬리언(Jiri Kylian)의 후계자로 지목될 만치 뛰어난 재능과 음악성을 지녔다. 1999년 초연된 이 작품이 무용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안무상을 수상한 것도 춤을 통한 바흐음악의 재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레단 창립 30주년 기념공연으로는 이 작품이 과연 적절했을까. 15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았던 창립 15주년 기념 공연인 ‘라 바야데르’의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100명이 넘는 무용수들과 코끼리 상까지 등장하던 웅장하고 화려했던 무대, 부채춤과 북춤, 물동이춤까지를 포함시켰던 디베르티스망의 다양한 볼거리, 그리고 주역을 맡아 춤추던 문훈숙의 영감어린 춤들로부터 받았던 감동의 기억을 떠올려볼 때 쓸쓸함이 남는다. 이러한 느낌이 한 때 국립발레단을 능가한다는 명성을 구가하던 유니버설발레단의 쇠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