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아트 바젤(1): 철학자의 사적인 리뷰
홍콩 아트 바젤(1): 철학자의 사적인 리뷰
  • 조경진 철학자/연세대 철학박사 수료
  • 승인 2014.06.03 2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art 1>

Overview

 

홍콩에서 매년 열리는 아트 바젤에 다녀왔다. 바젤을 잘 모를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소개하면, 아트 바젤은 프리미엄을 표방하는 세계적인 상업화랑 전시회이다. 1970년 만들어졌고, 매년 미국의 마이애미 비치와 스위스의 바젤, 그리고 홍콩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이름 그대로 본산은 스위스이고 북미와 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되어 왔다. 아트 바젤이 다루는 영역은 20세기 이후의 현대 미술과 동시대 미술이다. 이번 전시는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홍콩 컨벤션 & 엑서비션 센터Convention & Exhibition Center에서 열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트 바젤은 세계 최대 규모의 상업 화랑 전시회이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유수의 갤러리들이 직접 선정한 작가들의 작품들로 부스를 꾸린다..

참가한 갤리리만도 250여개에 이르고, 나라나 지역도 근 40개에 달하니 전시의 규모나 내용의 스펙트럼에서 가히 세계 최고를 자랑할 만하다. 둘러본 결과 각 부스 당 약 10개 내외의 작품들이 있으니 어림잡아 2000개 이상의 작품들이 전시됐다고 보면 된다. 조금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하루에 6시간씩 삼일은 둘러봐야 할 정도다.

부대시설을 제외하고, 순수 전시 공간은 두 개 층에 걸쳐 있고, 순수 미술 전시는 각각의 기획 의도에 맞게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전체 부스 중에 70프로(171개의 화랑)를 차지하고 있어 전시의 핵심을 차지하는 Galleries, 각 갤러리에 소속된 큐레이터들이 아트 바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프로젝트나 개인전을 선보이는 Insights(통찰), 근래에 주목받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개인전이나 2인전으로 구성된 Discoveries(발견), 규모가 큰 작품이나 설치 미술을 위해 마련된 Encounters(만남)이 그것들이다.

 

▲아트 바젤 전시장 입구. 이 사진에서 전시의 규모만을 가늠할 수 있으면 족하다. 전시는 1층과 3층에서 열렸는데, 대략 각각 축구장 하나 정도의 규모라고 보면 된다
특히 이번 전시가 홍콩에서 열리는 만큼 아시아나 아태 지역 화랑들을 위해 전체 전시 공간 중 절반이 할애되었는데, 한국에서도 국제, Kim, 학고재, 아라리오, 박유숙, PKM 등에서 참여했고, Discoveries 섹션을 제외하고 고루 전시 공간을 꾸렸다.

 

아트 바젤이 특별한 것은 그 규모와 다양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트 바젤은 프리미엄을 추구한다. 이미 세계의 예술계에서 예술성이 검증된 작가와 작품이 참여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바젤을 통해서 현대 미술과 동시대 미술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다. 바젤의 진정한 묘미는 바젤이 순수한 예술적 가치와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의 황금분할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젤에서 만큼은 예술적 가치가 교환가치라는 등식도, 그 역도 성립한다. 쉽게 말해 잘 팔리면 곧 좋은 예술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말이다. 또 바젤은 새로운 실험보다 이미 검증되어 정착된 것을 좋아하고, 개인적 취향보다 다수의 취향을, 일시적인 것보다는 미래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바젤에 참여한 작가들은 단지 지금만 훌륭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명성이 유지될 수 있음을 스스로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증명해 왔어야 한다.

물론 더 이상의 검증이 필요 없는 작가들도 있다. 그들의 명성은 이미 확고하다. 이우환, 데이빗 호크니, 게하르트 리히터, 애니쉬 카푸어, 척 클로즈, 데미안 허스트 등이 그들이다. 바젤의 다른 묘미는 방금 나열한 것과 같이, 미술사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는 바젤이 주는 큰 기쁨 중에 하나이다. 당신이 미술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이런 작품도 했었나’라는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

철학자의 눈

이제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읽히길 바라는 사적인 리뷰이다. 이 리뷰의 주된 내용은 철학자의 눈에 비친 아트 바젤이다. 철학자는 추상과 일반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의 추상과 개념은 구체로부터 정합적 상상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어야 하며, 다시 구체에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성도 개별로부터 도출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헛소리가 되지 않는다.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예술은 추상과 구체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장 구체적인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미시적이고 궁극적인 존재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성의 사건이며, 가장 추상적인 것은 순수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개념들과 보편자들의 세계이다.

철학도 예술도 이 추상과 구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하지만, 철학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향하고, 예술은 반대로 끊임없이 추상에서 구체로 향하려 한다. 철학은 개념을 다루지만, 예술은 감각을 다룬다.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의 모험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감각의 모험이다. 이것이 차이다. 다행히도 나는 예술철학자이고, 이 리뷰는 바젤의 구체적인 예술작품들로부터 일반적인 예술론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감각이라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이 놓여 있다.

철학자는 최대한의 일반성을 갈구한다. 그래서 나의 리뷰의 최종 목적은 아트 바젤의 궁극적 일반성에 관한 것이다. 아트 바젤은 비엔날레와 다르게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테마가 없다. 그냥 아트 바젤이다. 무엇을 내놓을지는 전적으로 화랑 맘이다. 아트 바젤의 성격상 작품들은 시대, 장르, 영역, 재료, 주제 등에서 너무도 다양해서 전체를 아우르는 리뷰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면, 이 한정된 지면에서 다룬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깝다.

그러나 이 다양성에도 한 가지의 일반성이 존재한다. 갖가지 목적을 가지고 바젤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 그리고 작품과 작가, 전시 공간, 전시 관련자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일반성이란 무엇일까? 가장 궁극의 일반성은 ‘좋은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질문 그 자체이다. 바젤의 성격상, 이 질문은 이미 교환가치(무엇이 얼마의 가격으로 책정되는가)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며, 또 동시에 ‘동시대’ 예술에서 좋은 작품은 어떤 것인가라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질문에는 결국 동시대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바젤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ART’ 바젤이니까. 바젤의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일반성을 암묵적이고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으며, 만약 중심을 잡고 전시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질문을 지속적이고도 의식적으로 던지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다음 번 아트 바젤 구경을 갈 계획이고, 어리둥절하지 않고 싶고, 당신이 전문적인 컬렉터가 아니며, 또 단순히 아이디어를 얻는 차원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 질문들을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가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볼 때 느끼는 정신의 혼미함이나 반대로 파편화된 몇 가지 인상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엔 입장료(주말엔 4만 5천원이나 한다)가 너무 비싸다.

잡설이 너무 길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지면으로 이제 위의 질문에 답해야겠다. 우선 동시대성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각의 모험이다. 예술은 언제나 감각의 문제였다. 항상 그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니까. 그러나 그것에 ‘모험’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감각이 어딘가에 매여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심지어 천대받기도 했다. 미술과 철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본래 감각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등 유기체는 그들의 생존의 요구에 따라 감각을 고도로 추상화시켜 대상들의 명석판명한 분별, 즉 표상적 요구에 종속시켜왔다. 예술에서 감각은 형상적 재현에, 종교적 이념에, 언어적 텍스트에, 또 심지어는 개념과 지각적 도식(예컨대 원근법), 그리고 눈앞에 직접 현시되는 사실이나 망막의 인상에 묶여 있었다. 감각이 모험을 시작한 것은 색의 해방가로 여겨지는 마티스로부터다. 그러나 그의 감각은 여전히 시각적 구성에 매여 있었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감각은 아마도 버넷 뉴먼의 순수한 색면추상일 것이다.

 

▲강형구, Van Gogh, 2014, oil on canvas
그러나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감각이란 다시 추상이다. 동시대의 예술가들은 감각이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매일 수 있기를 원한다. 전혀 구애받지 않는 감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과도 연관될 수 있는 감각을 원한다. 이것이 동시대 예술가들의 감각의 모험이고 감각의 해방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시대의 한정, 흔한 말로 시대정신은 있는 법이다. 바젤의 예술가들은 감각을 지각의 도식, 예컨대, 개념적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사람, 지각적 전체로서의 통일된 형상으로서의 사람으로 환원시키는 일 따위에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러니 전시장에 가면 이런 생각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확인하려 하지 말라. 설사 그런 작품이 있더라도 그 작품이 당신에게 느끼라고 한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한국작가인 강형구의 <Van Gogh>는 고흐의 얼굴이 아니라 고흐의 영혼과 영혼의 상태, 정서적 에너지를 그리려고 한 것이다. 또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지각 대상과 습관적 도식에 연결시키려는 일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Anish Kapoor, Untitled, 2014, Stainless steel and lacquer
애니쉬 카푸어의 작업을 보라. 그의 작품에 점점 다가가면 시각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더 이상 명석한 분절이나 동일성의 형상은 사라지며, 정서와 에너지로서의 신체적 감각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분절에 익숙하지 않은 유아의 원초적 감각과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감각을 질료적 실체로서의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 존재감을 갖는 물질로부터 끌어내려 하며, 감각을 우리의 지각적 도식(습관이나 인지 도식)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차원에서 작동하도록 한다.

 

그들은 그들의 색, 물감, 그들의 재료가 우리의 이성이나 생존을 위해 만들어 온 지각의 습관이 아니라, 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신체라는 가능성의 보고로 곧장 향하길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감각의 본래적 모습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Part2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