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경기소리꾼 이희문(이희문컴퍼니 대표)]젊은 국악인 계보 핵심 잇는 ‘뜬구름 잡는 소리꾼’
[인터뷰 - 경기소리꾼 이희문(이희문컴퍼니 대표)]젊은 국악인 계보 핵심 잇는 ‘뜬구름 잡는 소리꾼’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4.06.05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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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 조감독 그만두고 20대 후반 입문한 소리판, 올해 11년차 접어들어

     이희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12잡가 이수자로 11년차 경기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2008년 처녀작 ‘희문’을 시작으로 매해 경기소리 신작 공연을 올리고 있으며, 2010년부터는 일회성 공연에 그치지 않고, ‘거침없이 얼씨구’, ‘황제, 희문을 듣다’ 등 작품 레퍼토리화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개인공연 외에도 20대 여성소리꾼 그룹 ‘앵비’, 평범한 어머니들로 구성된 ‘숙씨스터즈’, 20대 꽃미남그룹 ‘놈놈’ 등 다양한 프로젝트그룹을 기획 및 연출해 경기소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며 자유로운 사고와 그에 걸맞는 튀는 옷차림으로 어딜 가나 눈길을 모으던 그가 생각지도 않은 소리판에 뛰어들게 된 건 스물여덟, 누구와 비교해서도 확실히 늦은 나이였다. 더군다나 전공 역시 영상 관련이었고, 일본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인재였다. 그런 그가 소리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봉창을 두들겨도 유분수지 미친 것 아니냐고 해댔다. 물론 소리와 인연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인 고주랑 명창을 따라 경기소리를 익히 들어왔기에 소리가 낯설지 않은 정도였지, 어머니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소리에 관심 있냐고 묻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히 찾은 국악공연장에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무대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라고 따르던 이춘희 명창에게 새삼스레 그 모습이 낯설었던 것일까. 옆에서 지켜보던 이 명창은 그에게 소리해보지 않겠냐고 했고,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그는 그렇게 소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뮤직비디오 감독 입봉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소리는 단순히 취미 그 이상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리를 시작한지 고작 5개월 만인 2003년 10월, 경서도 소리공연대회 은상을 수상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얼떨결에 출전해 거머쥔 상은 원래는 1등이었지만 경력이 너무나도 짧은 그에게 주기에는 상의 면이 안 선다하여 격하된 것이란 말도 들렸다. 이 정도면 그의 원래 길은 소리였다는 사실이 초반부터 증명된 셈이었다. 마침 MP3가 나오면서 CD 판매량이 급감해 가수들이 뮤직비디오 제작예산을 훅 깎는 추세는 그가 소리에 본격 매진할 수 있게 하는 운명적인 역할을 한다. 그게 벌써 11년 전 이야기이다.

     경기소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등 전통 음악의 새로운 해석과 시선으로 경기소리를 풀어내고 있는 그는 오늘날 젊은 소리꾼의 핵심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남자소리꾼으로서는 귀한 미성의 목소리가 특징인 그를 만났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12잡가 이수자, 이희문컴퍼니 대표, 서울예대 출강 중 / 2010 제16회 전국민요경창대회 종합부문 대통령상, 2008 제15회 전국민요경창대회 경기좌창부문 최우수상, 2006 제26회 온나라 국악경연대회 민요부문 문화부장관상 등 다수 수상 / <황제, 희문을 듣다> <거침없이 얼씨구> <뜬구름 잡다> 등 발매

-올해 초,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이미 여러 차례 후보에는 올랐으나 이제야 받았다. 소감에서 ‘뜬구름 잡다가 수상했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었나?
“요즘 같은 시대에 전통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라고 본다. 너무나도 힘든 길이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허황된 것 같기도 한 이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아주 강해야한다. 이제 소리한지 11째 접어들었는데, 지금껏 소리를 이어왔기 때문에 수상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나. 앞으로도 뜬구름 잡는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지구력을 이어나가라는 격려 차원에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겠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12월 ‘뜬구름 잡雜다’란 공연을 했다. 경기12잡가를 주제로 한 공연이었는데, 여러모로 본인에게 화두를 던져준 표현인 것 같다.
“예술인으로서 내가 뜬구름 잡는 사람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 때였다. 그리고 내게 12잡가는 경기소리꾼으로서 언젠가는 넘어야할 과업 같은 거였다. 그 두 가지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잡’ 아닌가. 그래서 그걸 콘셉트로 나온 제목이다. 아예 전통으로 가야할지, 새롭게 가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희문 화化’ 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안은미 선생님이 무대연출을 하셨는데, 내가 제대로 마음껏 놀게끔 해주셨다.”

-경기소리꾼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경기12잡가 이수자이다. 경기민요와 경기잡가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원래는 8잡가였는데, 이창배 선생님께서 정리하시면서 12잡가가 됐다. 잡가란 그 시대의 유행가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면, 판소리는 서사구조를 갖고 길이가 긴데, 그걸 함축시켜서 장형시조 같은 형태로 나온 게 잡가이다. 반면, 잡가가 긴 시라면, 민요는 짧은 시이다. 또한 민요는 소리꾼들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교창형식으로 이뤄져있으니 구조 자체도 다르다.”

<거침없이 얼씨구> 중

-20대가 훌쩍 넘어 소리를 시작했으니 뒤늦게 입문한 셈이다.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느닷없이 소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전까지는 소리는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다. 어머니가 소리를 하시지만 오히려 날 그쪽으로 보내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한창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을 때, 국악 관련 영상 제작거리가 있을까 싶어서 어머니를 따라 공연장을 찾았다. 그날 이춘희 선생님을 오랜만에 뵀다. 어렸을 때부터 이모라 부르며 따르던 분이었다. 난 공연을 보면서 어렸을 때부터 들어와 익숙했던 민요를 무심결에 흥얼거렸는데 그걸 보신 선생님께서 나보고 소리해볼 생각 없냐고 하시더라. 28년 넘게 살면서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나한테 소리하겠냐고 물어보지 않았는데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새로웠다. 어머니조차 안 그러셨으니 말이다. 다음날 선생님 앞에서 ‘긴 아리랑’을 불러봤고, 선생님은 나보고 ‘너 아무래도 소리해야겠다.’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반대는 없었나?
“다 큰 아들 이제껏 공부시킬 만큼 다 시켰으니 알아서하라는 반응이셨다. 그런데 어머니보다는 어머니 주변의 다른 선생님들 반대가 컸다. 유학까지 다녀와서 멀쩡히 자기 일하고 있는 애를 갑자기 무슨 소리를 시키느냐며 이춘희 선생님과 부딪힌 거다. 선생님께선 날 책임지겠다며 나서셨고, 결과적으론 선생님께서 이기신 거다.(웃음)”

-듣고 보니 어렵게 시작한 소리인데, 후회한 적은 없었나?
“시작하고 3년 정도는 마음고생 꽤나 했다. 명창의 아들이란 내 배경과 이춘희 선생님을 등에 업고 나왔다는 말들이 날 따라다니며 남들의 미움을 샀다. 또 내 옷차림도 한몫 거들었다. 뮤직비디오 찍던 20대 청년인데 옷차림이 얼마나 자유분방했겠나.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왜 저러냐며 선생님들께 찍히곤 했다. 소리는 너무나도 좋은데 시스템이 힘들었다. 나랑은 너무 맞지 않아 관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안은미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선생님과 교류하면서 한 5개월가량 소리계를 잠시 떠나있었더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지내면서도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알고 보니 다른 세계가 있더라.”

-안은미 선생이 구세주였던 셈이다. 그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지금까지도 꾸준히 작품을 함께 해오고 있는데…
“나와 친한 미술평론가 이정우 씨가 안은미 선생님과도 가까웠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남자소리꾼을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오디션을 보러 갔다. 특이하게 날 노래방으로 데리고 가셨는데, 원래 그렇게 보신다더라. 신이 난 나는 노래는 물론 춤도 추며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드렸고 그 자리에서 오디션 합격판정을 받았다. 그 후 공연 성사까지 2~3개월을 더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전화하셔서는 대뜸 나보고 주인공을 하라고 하시더라. 그게 바로 ‘바리’였다. 선생님이 춤추는 바리, 나는 노래하는 바리를 맡는 거였는데, 여자 역할을 하라고 하니 사실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바리’가 선생님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다. 2011년 한국예술단체로서는 최초로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돼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그 후 프랑스, 멕시코 등에서 꾸준히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춤도 라이브로, 소리도 라이브로 하니 해외에서 그렇게 좋아해주더라.”

-안은미 선생의 얘기를 더 안 할 수가 없다. 안 선생을 어머니라고 부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선생님과 교류하면서 ‘세상에는 안 될 것이 없다’란 생각이 들더라. 특히 소리랑 춤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나 싶었는데, 완벽히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곤 생각의 전환이 왔다. 선생님께서 내 자신을 찾아주신 거다. 예술적인 멘토이시자 내게 예술철학을 심어주셨다고 해서 어머니라고 부른다.”

-신선한 기획과 구성의 공연, 프로젝트를 올려 주목을 받아왔다. 구상 중인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면 살짝 알려 달라.
“원래 경기소리에는 당시의 사회풍자적인 내용을 담아 그 시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입담이나 재담이 있었다. 하지만 남성소리꾼들이 줄어들고 여성소리꾼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재담이 점차 사라지게 됐다. 올해 신작에서는 이젠 보기 힘든 재담을 다시 되살리고자 한다. 지난해 주제어가 ‘잡’이었다면 올해는 ‘쾌’. 유쾌, 상쾌, 불쾌, 통쾌 등을 주제로 고민 중이다.”

<적벽가> 중

-대중화 또는 전통 보존 등 국악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곤 한다. 전통 음악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는지?
“미래는 예측불허. 솔직한 심정으로는 참담하다고 말하고 싶다. 국악의 대중화란 말은 어폐가 있다고 본다. 국악이란 단어를 쓰는 순간, 그때부터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판소리, 경기민요 등 각각 자기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그걸 국악이란 카테고리 안에 묶어놓는 게 마치 한데모아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린 느낌이랄까. 각각의 이름이 없어지니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대중들은 그 시대에 주목받는 전통예술인들이 전부인줄로만 안다. 예를 들어 안숙선 선생님을 보고는 판소리가 국악의 전부라고 알고, 요즘에는 송소희 양을 보면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국악인줄 안다. 전공학생들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전공조차도 소화를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퓨전, 콜라보 작업에 뛰어들게 되면 더더욱 정체성만 잃고 만다. 전통 음악인들의 많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이럴 때일수록 기초를 더 다져야하고, 역사를 알고 자기 전공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정신과 철학이 있어야 전통을 지키거나 대중화에 나서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예정된 공연이 있으면 알려 달라.
“고궁음악회, 전주대사습 등이 예정돼 있고, 숙명가야금연주단과 아동음악극 ‘매우매우씨’도 함께 한다. 7월에는 국립극장 여우락페스티벌에서 장영규, 이태원 감독과 함께 민요프로젝트 공연 ‘제비-여름-민요’에 참여한다. 오늘날 죽어있는 민요를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가는 재밌고도 다소 엉뚱한 무대가 될 것이다. 이어서 지방공연들도 다수 잡혀있으며, 10월에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뜬구름 잡다’를 기획공연으로 올린다.”

-국악인으로서의 꿈은 무엇인가?
“공연을 많이 만들어보고 싶은데, 무림의 고수가 돼 어디서든 뭘 주문하든 다 할 수 있는 그런 소리꾼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나 공연을 쭉 해나갈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