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없는 춤, ‘묵향’-국립무용단의 춤 다시 보기
향기가 없는 춤, ‘묵향’-국립무용단의 춤 다시 보기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4.06.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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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무용작품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용가의 몸이다. 몸은 춤동작의 알파벳이고 몸으로 쓰여 지는 춤은 입체적 문장이 되어 관객들의 눈에 읽혀지고 마음을 파고든다. 의상은 전달 효과를 높여주기 위해 몸에 추가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무용수의 신체 라인을 드러내고 주제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줌으로써 관객들의 작품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의상의 기본적 기능이다. 주제와의 조화가 필수요건이라면 범하지 말아야할 첫 번째 금기사항은 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춤은 음악이다’란 말을 흔히 쓰면서도 ‘춤은 의상이다’란 말에 생소해지는 것은 의상의 제한적 역할 때문일 것이다. 윤성주가 안무하고 정구호가 연출과 의상을 맡은 ‘묵향’은 어떤 면에서 몸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의상의 한계를 거부하고  무용의상의 미를 독립적으로 추구해보고자 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31일부터 6.7일까지 해오름극장에서 ‘단’(壇)과 교대로 공연된 ‘묵향’을 나는 다시 보았다. 무용공연이라기보다 패션쇼를 방불케 했던 초연의 변화가 궁금했다.

초연(12.6, 해오름극장)에서와 같이 묵향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을 표현하는 4개의 독립된 춤에 서무(序舞)와 종무(終舞)를 포함한 6장으로 구성된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탕건을 쓴 8명의 남성무용수가 서막을 연다. 학무를 연상케 하는 선비 춤이다. 거문고와 콘트라베이스의 단조로운 중저음을 배경으로 느리지만 장중한 움직임 속에서 새롭게 춤판을 열어가는 긴장이 느껴진다. 이어지는 매화(梅花)의 장은 자줏빛 저고리에 흰 통치마를 입은 여인들의 춤이다. 솔로로 시작하여 군무로 바뀐다. 3장은 난초(蘭草)의 장이다. 쥐색 두루마기를 입은 3명의 남성무용수와 같은 색 치마를 입은 여성무용수 3명이 짝을 이룬다. 풍성한 노란색 치마와 검정색 저고리가 국화(菊花)의 장을 꾸며낸다. 가을의 풍요함보다 계절의 쓸쓸함을 떠올리게 하는 느린 춤사위다. 춤과 조화되지 않는 날카로운 해금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대금산조를 배경으로 긴 대나무장대를 들고 나온 남성군무가 죽(竹)의 장을 구성한다. 창술동작을 닮은 춤사위가 선비들이 일필휘지로 휘두르는 붓의 기개보다 사무라이 춤을 연상시킨다. 12명 여성과 1명의 남성무용수가 등장하는 종무는 6개 장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무용수들이 표정을 드러내고 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피날레다. 가야금과 바이올린 선율이 조화를 이루며 서무와 함께 묵향의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준 장면이다.

초연과 비교해볼 때 2014년 묵향은 몇 가지 변화를 보여준다. 우선 색채가 눈에 띄게 줄었다. 국화의 노란 색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의상이 검은 색과 쥐색, 흰색 등 모노톤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기보다는 애매했던 작품의 콘셉트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통치마의상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옷의 무게에 눌려 움직임이 둔탁했던 무용수들의 몸도 많이 가벼워지고 느슨했던 무대의 긴장감이 살아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문인화를 대표하는 4군자를 통해 4계절의 아름다움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살려내고자 했던 의도는 이번 작품에서도 빗나간 느낌이다. 정숙함을 통해 무대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단순한 색감과 느린 동작을 기본으로 격조 있는 무대를 만들려는 노력은 보이지만 춤에 생기가 없고 무대에 여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기엔 아름다우나 향기를 풍기지 않는 조화처럼 춤의 향기가 없다는 것이 묵향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4폭 병풍을 형상화하여 세로선으로 등분 된 무대배경과 병풍에 촘촘히 찍혀지는 일본식문양의 꽃송이들은 답답하고 표정없이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서 자연스러움 춤의 흐름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아쉬움이다. 빈틈없이 꽉 짜인 안무와 연출로 우리 식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여백이 주는 향기를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무대미술에 방점을 두다보니 의상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워 무용수들의 춤이 부자연스러웠다”는 초연에서의 평가는 이번에도 역시 유효하다. 춤을 위한 옷이 되어야지 옷을 보여주기 위한 춤이나 춤보다 옷이 강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춤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