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부러진 삽(Broken Shop) 이야기(1)~(2)
[윤진섭의 비평프리즘]부러진 삽(Broken Shop) 이야기(1)~(2)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4.07.1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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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부러진 삽(Broken Shop) 이야기(1)

2010년 11월 22일, [Pan Asia Performance Festival]이 열리는 문래예술공장에 가던 나는 도로변 화단에 누가 버린 부러진 삽자루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가지만 앙상한 화초들 사이에 부끄러운 듯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지나쳤다가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다시 가 그걸 주워 가지고 행사장으로 갔다. 삽자루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일하고 있는 팀원에게 매직 팬을 달라고 해 삽자루에 ‘Broken Shop’이라고 썼다. 손잡이 부분에는 정자로 ‘부러진 삽’이라고 썼다. 아무 쓸모없던 죽은 나무가 생명을 지니고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부러진 삽을 실제로 접한 사람은 알 게 될 것이다. 왜 그것이 "Broken Shop"이 된 줄을. 삽의 손잡이 부분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진실. 그것이 실제의 삽자루에 담겨있다. 이렇게 해서 부러진 삽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나는 삽자루에 당시 페스티벌에 참가한 작가들에게서 사인을 받은 뒤 그것을 들고 각자 다양한 포즈를 취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입에 문 사람, 삽자루를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누는 연인, 삽질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포즈들이 등장했다.

부러진 삽(Broken Shop)
2010년 12월 12일, 나는 페이스북에 [Broken Shop]이라는 그룹을 창설하고 친구들을 모았다.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프랑스의 예술가 알랭 파파로네(Alain Papalone)는 ‘Broken Shop’의 생애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는 여러 점의 작품으로 그에게 옷을 입혀줬다. 그 정성은 여느 애견가가 사랑하는 애견에게 쏟는 것 이상이다. 나는 앞으로 이 그룹의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처럼 facebook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예측불가능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매력이다. 그것의 매력은 예정된 항로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옆길로 새고, 새 길을 개척하고, 다른 길로 건너뛰고, 온 길을 다시 가고, 갈 길을 예상하여 미리 길을 만드는 데 있다. 그것은 선형적인 구조가 아니라 땅속줄기와 같은 리좀(rhizome)의 구조를 닮았다. 그런 구조란 대체 어떤 것인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이제 인류는 ‘땅속줄기(rhizome)’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면서 연결된다. 영화 아바타의 대사 중에 주인공인 제이크가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1조개의 나무들과 연결돼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말은 리좀을 연상시킨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사이버 상에서의 연결은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선사인들의 동굴속 삶은 제의(ritual)를 통한 환상의 세계와 생존이 위협을 받는 절박한 현실이 결합된 삶의 한 축도이다. 그들은 동굴 벽에 죽여야 할 대상인 소들을 그리고 거기에 창을 꽂는 동작을 통해 소를 실제로 죽인 것으로 믿었다. 이성으로 무장한 근대인(modern man)은 상징과 신화, 설화를 죽인 장본인이다. 문명의 장구한 진보의 결과물인 종이는 이제 인간의 상상력을 만화의 작은 칸막이 속에 가둔다. 어린이나 원시인은 팔이 잘린 만화의 컷을 보면 실제로 팔이 잘린 것으로 믿는다. 이는 선사인들이 동굴 벽에 소의 모습을 누대(累代)에 걸쳐 겹쳐 그린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나는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상상력이 살아 숨쉬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상상의 공간이 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처럼, 선승(禪僧)이 던지는 법어(法語)처럼, 한 마디의 말이 진리의 경지를 보여준다.

부러진 삽을 든 행위예술가 성능경의 포즈
부러진 삽(Broken Shop) 이야기(2)


그러면 부러진 삽의 운명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Broken Shop’의 프로파일에 “‘부러진 삽’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 화산도 될 수 있고, 또 때로는 달콤한 사탕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며 또한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썼다. 그것이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주술적 힘을 발휘했는지 그 이후에 흥미 있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것은 부러진 삽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2011년 2월 2일, ‘Broken Shop’의 회원인 볼프(Wolf Nkole Helzle)가 벌겋게 녹이 쓴 삽날의 사진을 프로파일에 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게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 뒤뜰에서 발견했다고 즉각 코멘트 난에 썼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혹시 걸작이 될지 모르니 잘 간직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Broken Shop’의 일부이니 이미 걸작이 된 거나 진배없다고 능청을 떨었다.
 이 일화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부러진 삽의 생애에서 첫 번째로 일어난 ‘사건(event)’이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즉각 마르셀 뒤샹의 <샘>를 떠올렸다. 1917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던가?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고 사인을 하여 [앙데팡당전]에 6달러의 출품료를 내고 출품한 그것은 심사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심사에서 떨어지자 뒤샹은 심사부위원장 직을 사임하고 그 사건의 전말을 잡지 <장님(Blind)>에 기고하지 않았던가? 그 후 <샘>은 원래의 것은 없어졌고 두 번째 것은 1951년 뉴욕에서 시드니 재니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세 번째 것은 1964년 밀라노에서 슈바르츠에 의해 여덟 개 한정판으로 주문 생산되었다. 

서구포항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습(부러진 삽의 두번 째 부인)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부러진 삽이 뒤샹의 <샘>의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부러진 삽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내가 화단에서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잠깐 눈길만 주었을 뿐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다 어느 정도 걸어가던 나는 어떤 알지 못 할 힘에 이끌려 되돌아가 그것을 손에 쥐었다. 나는 부러진 삽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면서 문래예술공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놈에게 이름을 지어주자. 뭐라고 지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broken'이라는 영어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부러진’이라는 뜻이다. 그때 이어서 퍼뜩 떠오른 단어가 ‘shop'이다. 상점, 그렇지. 그건 ‘삽’과 매우 비슷한 발음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Broken Shop’이란 영어 명이 탄생한 것이다.
  2011년 1월 25일, 제주도에 놀러간 나는 서귀포 항을 향해 길을 걷다 길옆 축대의 돌 틈 사이에 끼워져 있는 삽날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처음 봤을 때 그것은 돌 틈 사이에 부끄러운 듯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순간 나는 집에 두고 온 부러진 삽자루를 상기하면서 짝을 채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삽날을 가로수에 기대놓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해서 부러진 삽은 볼프의 것과 내 것을 합쳐 모두 두 명의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참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후기:그 후 페이스북의 많은 친구들이 젊거나 늙은 더 많은 신부들을 소개시켜줘 부러진 삽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http://www.facebook.com/#1/groups/broken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