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종상 화백]한국의 벽화-고구려 벽화 2
[특별기고-이종상 화백]한국의 벽화-고구려 벽화 2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4.08.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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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랑 이종상 화백
통구의 무용총 주벽에는 천막을 걷어올린 넓은 내실에 승려를 초대하는 주인 「접용도」가 그려져 있는데 식탁 구성에서 공간의 심도를 표현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원근도 없다.

주실의 서벽에 「수렵도」는 너무도 잘 알려진 것이며, 얕은 계선으로 도식적인 산맥의 표현과 평면적 구조로 산재된 기마 인물과 천상을 의미하는 조문으로 배경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 최근 북한에서 발굴했다는 강서군 낙수리 고분의 수렵도가 있는데 산과 인물의 크기가 비슷하고 귀인은 크고 시종은 작게 그려져 있는 것이 더욱 두드러지며, 산봉은 등고선으로 동양화 특유의 준법과 같은 초기적인 수법을 썼다. 산봉 정상에 수목을 도식화하여 배렬한 것은 무용총의 수렵도와 다르나 거의 동년대에 축조된 대동소이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런 류의 수렵도는 한대(漢代)의 착금동통(錯金銅筒)  수렵도가 범본(範本)이 되어진 듯하다.

동벽에는 무용도가 그려져 있는데 완만한 율동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천장화(天障畵)로는 비천(飛天)?인면조?쌍학?성진?선인?연화 등이 배렬되어 있고, 창방 위에는 육조불(六朝佛)의 광배(光背)를 모방하여 삼각화염형이 그려져 있다.

전실 벽화는 습기 관계로 탈락이 심하여 불분명하나 생전의 생활 양식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특히 중국 벽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 양식으로 현실(玄室)사각에 기둥을 그려 생전의 거실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中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최근 발굴된 평남 강서군 수산리 고분의 동벽 남자상 좌상부에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두기에 굵은 곡선과 직선으로 문양을 넣은 것이 발견됐는데 지금까지 두기(枓棋)에 무늬가 그려진 벽화는 이것이 처음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전실에 그려진 마안, 인물, 건물 등의 벽화는 주?암적?녹청 ?황 등의 색조를 썼는데 적색과 황색이 주조를 이루어 화면은 아주 밝다.

각저총의 부부상도 인물이 사면위로 표현되고 얼굴에 감정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무용총 作品과 同一人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外 전기 벽화로는 노산리 개마총의 천장 동벽 제일층급부에 행열도가 겨우 남아 있다. 후기에 들어가면 배색에 있어서 능숙해지고 불교적 色彩가 濃厚해지며 肖像이나 風俗圖 같은 것은 없어지고 初期엔 主壁에 약간 비쳤다가 前期엔 천장화로 올라갔던 사신도를 다시 주벽에 그리는 것이 流行하였다 우현리 삼묘에는 잘 손질한 大石 위에 직면 벽화를 그린 훌륭한 作品들이 많이 나왔다.

이 중 대묘 벽화는 화강암 거석으로 구축된 壁畵 위에 灰칠 없이 직접 粗地 벽화 手法으로 제작한 수당초 화풍의 사신도가 주벽에 있고 층급부엔 당초문?비선?연화?서조?용 等이 표현되어 있다. 통구 사신총 벽화는 석회질혈암을 구축하여 직접 조지벽화를 그렸는데 사벽에는 사신을 활발 숙달하게 그렸고 색조가 단주?녹청?淡紫?황토?갈토?호분 등 다양하게 쓰고 있다.

1941年 조사된 진파리 1호분 벽화는 화장지 벽화 수법이며 사벽에는 비운, 비화, 樹木 等이 그려졌고 중앙부에 四神圖의 특색은 강한 운동감을 하고 있으며 육조 산수의 규각 있는 동적 감정과 유사하다.

연화의 표현 또한 부여 능산리 벽화의 연화처럼 원형이고 화판주록(花瓣周綠)이 훈채되어 중앙에 점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초전기 벽화는 불교사상에서 나온 연화가 도처에서 나오는데 후기의 사상은 중국 고유의 세계관이 도교의 유입과 보급을 반영하고 있다.

해방전 이미 30개의 벽화 고분이 발굴된 북한에서는 해방후에도 16個의 벽화 고분이 발굴됐다고 발표됐다. (일본 NTV를 위한 좌담 녹화에서) 강서군에서는 최근 수산리 1, 2호 고분 벽화를 비롯 대성리 1, 2호분(1959年) 약수리 고분(1964年)?안악 1, 2, 3 호분(1958年)?통구 12호분(1964年)?복사리 고분 등 수 많은 벽화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와는 달리 당시의 생활양식, 풍속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 것이 특색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수법으로 그려진 수산리 고분 벽화의 「예배보러 가는 여인상」(5C경)은 일본의 「아스까」벽화와 같이 행열을 구성하고 있으며 하의의 주름이 직선적이나 상단은 좁고 하단으로 넓어졌으며 원고근저법이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필시 일본 고분 벽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 황해도 안악 第3호분(4C반경)의 미천왕비상은 같은 화장지(花粧地) 벽화 수법인데, 비교적 탈락이 없으며 화면의 심도를 잘 표현해 주었고 역시 왕비와 시녀의 대소차가 보인다. 같은 3호분의 「주방도」는 당시의 복식, 풍습, 생활상, 의식주 등 아주 자세한 표현으로, 부뚜막에 솥을 걸고 그 위에 떡시루(?)를 얹어 놓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모습은 현재도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안악 3호분에는 보기 드문 「육고도」가 있으며 선이 굵고 강인한 기법의 「행렬도」가 있다. 특히 수산리 벽화의 북 치는 광경이나 강서군 대안리 1호분의 「직녀도」는 치기가 있는 듯하면서도 공간을 대담하게 살려 나간 화면의 처리 방법이 아주 현대 감각과 상통하는 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