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종상 화백] 고대벽화의 사적 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대한 연구-11
[특별기고-이종상 화백] 고대벽화의 사적 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대한 연구-11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4.09.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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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벽화-백제ㆍ신라ㆍ고려 벽화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지난호에 이어)
③百濟의 벽화
최근 잇단 벽화의 발굴로 말미암아 고대 한국 회화의 연구열과 백제 고분의 발굴로 새로운 백제 문화의 인식이 점고하면서 기히 발굴됐던 몇 점의 벽화에 대한 예술적인 평가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의 벽화는 6세기 초엽 고구려의 벽화 양식이 점차 한강을 남하하여 온화하고 질박한 표현으로 그 특성을 갖게 됐고 결국은 남해안을 거쳐 일본 키타큐슈의 고분 벽화 양식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웅진시대 벽화로 공주 송산리 벽화는 육조시대 남조풍이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되며, 벽화전축분에 문양전을 추적하여 벽화 부위만 주점토를 도장하고 호분으로 그 위에 사신도를 제작했다. 동서북 벽엔 光背形龕(광배형감)을 만들고 錄靑(녹청)과 朱砂(주사)로써 윤곽을 나타냈다.

충남 부여군 능산리에 있는 연화운문도와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와는 달리 선이 섬세할 뿐 아니라, 지극히 부드러운 율동감을 보이며 온화하고 세련된 벽화로 보아 600년대 백제 26대 위덕왕과 29대 무왕 사이의 왕능 벽화로 추정되며 잠시 평안했던 말기의 문化 예술을 느낄 수 있다.

④ 신라의 벽화
1964年 경북 고령에서 發見된 삼국시대 벽화도 고구려계의 蓮華文(연화문)인데 탈락이 심해 분명치 못하나 벽면에 점토를 도장하고 석회를 후박하게 입힌 다음 靑?錄?紅?褐色 등으로 線刻畵法(선각화법)을 사용한 듯하다. 천장화는 粗地(조지) 벽화 수법이므로 비교적 선명한 편이며, 가야지구 벽화는 백제 양식이 직접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통일기 이후는 왕능에 회칠로 마감하고 벽화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신덕왕능(917년)에는 십이지를 의미하는 朱黃?靑?白?藍色 등을 칠한 색채 벽면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신라 영역 안에서는 처음인 신라 최고의 통일 이후 彩縮壁畵(채축벽화)가 육조체의  「乙卯年於宿知述干 을묘년어숙지술간」이라 刻(각)한 묘지명과 함께 경북 영주군 순흥면 읍내리에서 발견(태홍변 교수팀, 1971年 8. 20)되었다.

이 고분 벽화는 많이 상하긴 했지만 천장의 연화문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벽화 중 가장 오래된 채회 작품이며 신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玄室(현실)을 가진 것으로 보아 역시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인정할 수 있다.

현실의 사벽, 선도, 천장과 벽에 神將像(신장상), 四神圖, 蓮華紋 등이 오색 찬란히 그려져 있으나 탈락이 심하다. 선도 천장에 그려진 연화문의 크기는 직경이 약 40cm이고 70cm정도의 외곽에는 당초문(혹은 인동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연화의 양식은 중엽 팔변인데 고구려 연화문이 끝이 뾰죽한 데 비해 화변의 폭이 넓고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며 주로 朱赤色調(주적색조)이나 은은한 윤곽선의 검붉은 색조는 鉛丹(연단)의 변색이 아닌가 싶다.

기법은 천장 판석을 정밀히 다듬어 그 안쪽에 粗地(조지) 벽화 수법으로 팔변중문으로 蓮華(연화)를 그렸는데 사벽 관대다리, 선도벽, 석문 외벽 等은 화강암 사이에 모두 석회석을 후박하게 도장하여 현실 천장과 사벽뿐 아니라 선도 양벽과 묘지명이 발견된 석문 바깥쪽에도 化粧地壁畵(화장지벽화) 수법의 벽화가 있었는데 일제시 도굴로 상당 기간 외부에 노출되어 흔적만 남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선도의 문 앞쪽엔 天衣를 입은 神將像(신장상)을 그리고 四壁엔 朱?靑?黑色調의 四神圖가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⑤ 高麗의 壁畵
당시 회화는 북종 화풍이 주류였으며, 특히 불승들에 의해 精緻(정치)한 사찰 불화가 발달하였는데 분묘화는 십이지신상을 지극히 간략하게 선과 색채만으로 화장지벽화 수법에 의해 그려졌다. 수덕사의 야화도는 필치가 섬세하고 색감이 嫩柔明快(눈유명쾌)하여 높은 품위를 보이며, 정석사 조사당의 인왕도는 선이 자유롭고 세련되었으며 선색조로 동작의 악센트를 주고 탈락 현상이 橫線(횡선)으로 보이며, 특히 백?황 등이 변색된 것 같다.

개풍군 청교면 수락암동(북한) 석실 고분에는 현실 내측 벽에 십이지신상이 간략한 선화로 약간의 채색을 입혀 그려져 있고 사신이 방위에 따라 그려져 있으며, 천장에는 천체도가 있다. 모두가 고구려 벽화에는 뒤떨어지지만 벽면에 양각과 음각을하여 선각채회 수법을 썼으며 십이지신상을 많이 그린 것은 당시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영향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보다는 좀 아류에 속하는 경기도 장단군 율서면 법당방 벽화가 발견(1971년 11월  8일 최남식, 김태순) 됐는데 비천형의 奏樂像(주락상)들을 주제로 한 이 벽화의 가치는 희귀한 남한 지역 발견의 우수한 작품이다. 고려시대 양식으로는 전혀 이례적인 쌍현실의 양식이며 제1현실의 동벽 우측에 5명, 서벽 우측에 1명(가장 선명한 편이다)과 제2현실 서벽 좌측에 5명의 무용상이 있으나 탈락이 너무 심해 하단부는 거의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화장지벽화의 인물상들이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고분의 축조 型式과 함께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이 역시 고구려 벽화계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 거의 직립형으로 묘사된 태락비천상으로 보아 과연 고려대 불교 문화 영역내의 벽화인지 지금 단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녀들의 표정은 우직하면서 치기있게 표현되어 있어 타벽화의 비천상과 같이 율동적이며 유선적인 운문유수묘보다 한층 실생활 감정과 접근할 수 있는 인간적인 리얼을 강조하고 있다.

서실의 무용인물도는 동실의 인물보다 20cm가 적어서 40cm이며, 그 중 맨 우측 인물은 바지를 입은 남자상인데 좌측 손발을 들어 율동의 자세를 보이며 모자엔 상모가 펄럭이는 인물상이 그 옆에 있고 세 번째는 수염이 완연하고 나머지 두 인물은 거의 주저앉은 모습인데 분명치 않다.

현실 천장에 연화문과 제2 현실 서벽에 사신상의 흔적이 보이며 흑색 쌍조선묘의 퉁소 부는 비천선녀들은 상의를 주, 하의를 청남색으로 칠하고 광배가 보인다. 화강석 위에 백회를 도장하고 습벽화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원색의 벽질이 비교적 없이 선명한 색상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석장골(재궁궐) 금괴봉, 중턱, 해발 420m지점의 경사 지역 때문이다.

하여간 거창 벽화는 신라 양시과는 이질적이고 고구려 말기 양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벽화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