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시, 에드바르드 뭉크>展, 첫 한국방문의 아쉬움… ‘뭉크의 우울함만 담은 전시’
<영혼의 시, 에드바르드 뭉크>展, 첫 한국방문의 아쉬움… ‘뭉크의 우울함만 담은 전시’
  • 박희진 객원기자/한서대 교수
  • 승인 2014.09.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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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진 객원기자/한서대 교수
우리는 뭉크라는 작가가 살아온 삶에서 짧은 단막극만을 감상하곤 마치 그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다 이해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 앞에 선다.

‘절규’라는 한 작품에 시선을 빼앗긴 우리들은 작품 속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뭉크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생각들을 확장시켜 그 경험을 통한 선입견으로 그의 작품들을 투영해 바라보고 있다.

지난 7월 3일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영혼의 시, 에드바르드 뭉크>전시는 노르웨이 화가 뭉크(1863-1944)의 국내 첫 전시로 열렸다.

한국 첫 방문인 뭉크의 회화와 판화, 사진, 드로잉 등 99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환영하며 그 간 ‘절규’라는 뭉크작품에 각인 되어버린 우리들의 선입견을 벗어내고, 새로운 기억으로의 뭉크 작품을 신선한 시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돼주길 바랐다.

노르웨이 뭉크미술관도 그런 의도에서 한국전시를 준비했던 것으로 도록 속 ‘큐레이터 말’을 통해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겐 이러한 전시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긴 어려웠다.

애초에 이러한 기획의 의도가 있었다면, 최소한 이번 전시를 통해서 뭉크 작품을 감상하고 우리 스스로 ‘절규’라는 작품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잠자던 감각들을 자극할 수 있어야 했다.

첫째, 인간이 내면에서 느낄 수 있는 기분이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뭉크의 표현력에 감탄할 수 있어야 했다.

둘째, 그의 회화와 판화 작품에서의 혼란스러울 만큼 리얼하고 복잡한 선들과 붓 터치, 관능적이고 멜랑콜리Melancholy 한 화면의 구성과 색채, 여러 소재의 다양한 판화 기법들을 관찰하면서 뭉크의 ‘표현주의’가 무엇인지 인지했어야 한다.

그뿐인가. 셋째, ‘불안과 소외, 비명’의 표현적 원동력으로 기억되는 ‘절규’라는 작품의 스타 기질도 짐작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뭉크는 어린 시절 병들어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며 커다란 상처를 받았고, 아버지의 신경과민과 사랑하던 연인의 충격적인 이별,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불안정한 화가의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 생의 춤 The Dance of Life(1925).

‘절규’를 비롯해 ‘병든 아이’, ‘병실에서의 죽음’, ‘마돈나’, ‘뱀파이어’, ‘여자’, ‘생의 춤’ 등 그의 삶은 화가의 작업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극단적인 소재가 되어 완성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불안정한 정신이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 아닌, 그의 말따라 자신의 요람을 수호한 ‘검은 천사’라는 의미에서 뭉크의 삶 속의 예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고통스런 삶은 이슈와 스캔들을 몰고 다닐 만큼 기발한 예술인 것이다.

노르웨이 밖까지 그의 명성이 퍼져나간 뭉크 작품의 신화는 뭉크 스스로가 집착할 만큼 많은 전시를 기획하고, 활동의 기반이 되는 미술계 인맥을 형성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 그대로를 예술로 표현하고 그 생생한 경험을 이슈화하는 뭉크의 사업적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뭉크, 그 영혼의 현대적인 삶(생의 프리즈)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5개 섹션에 19개 주제로 구성돼있는 전시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제1전시실의 좁지 않은 공간에서 펼쳐졌지만 관람이 수월하지만은 않다.

불규칙한 파티션의 높이와 섹션별 달라지는 벽면 색, 게다가 작품의 크기가 작고 작품 수까지 많으면 전시구성과 관람동선은 복잡해 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뭉크의 전시는 그가 갖고 있는 작품세계의 특수성과 예술성, 극단적인 표현들을 포함한 ‘판화’라는 소재가 전시연출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특히, 국외 교류를 통한 작품대여 전시에 있어서 국제적 작품의 보존관리 기준을 넘어 소장처의 요구에 따라 관람거리와 조도, 온·습도에 규제가 따른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연출에 있어 넓게 트인 공간에 조명 효과로 관람의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가장 기본이라지만 판화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조도(빛의 밝기)는 전시를 전체적으로 어둡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전시테크닉의 한계는 작품 보호차원이니 충분히 이해는 된다. 그렇다면 관람객을 위해 좀 더 친절한 전시를 준비했어야 했다.

관람시를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방향표시를 정확히 했어야 했고, 전시가 시대적 배열이 아니라면 관람객 스스로의 전시 이해를 돕는 전시 배경과 기획의도 외에 개별 작품과 섹션 주제에 대한 설명이 추가됐어야 했다.

아쉽게도, 뭉크의 첫 한국방문은 많은 대중에게 ‘우울한 뭉크’라는 기억을 더 짙은 남긴 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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