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윤덕경 서원대 체육교육과 교수] “장애인문화예술, 非장애인 함께해야 발전할 수 있어”
[인터뷰 - 윤덕경 서원대 체육교육과 교수] “장애인문화예술, 非장애인 함께해야 발전할 수 있어”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글-윤다함 기자
  • 승인 2014.09.26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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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21일 인천장애인아시안경기대회서 <어~엄마 우으섯다> 공연

 

     최근 개막한 인천 아시안게임이 폐막하면 이어서 10월 18일부터 장애인아시안경기대회가 개최된다. 내달 21일 선수촌 야외무대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가 함께하는 창작무용극 ‘어∼엄마 우으섯다’가 오른다. 장애인들의 축제이자 장애인예술무대를 선보일 장이 될 이번 공연의 총예술감독을 맡은 윤덕경 서원대 체육학과 교수(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부이사장).

     전문무용수와 장애인예술가의 복합예술 무대이자 시대가 요구하는 나눔 문화 실천을 위해 기획된 무대로서, 장애인들에게 내재돼 있는 예술성과 가능성을 새로운 도전 정신으로 재탄생시켜 다양한 형식의 예술과 움직임의 융합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참가 선수들 외에도 각 나라의 공무원, 봉사자 등 6천여 명에 이르는 관객들 앞에 올릴 무대라 더욱 뜻 깊다고 할 수 있겠다.

     17년 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초연된 ‘어~ 엄마 우으섯다’를 시작으로 지금껏 장애를 넘어 모두 하나 되는 감동의 한국창작무용을 선보여 왔던 윤 교수는 현재 서울시 내 고등학교 특수학급 장애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장애인무용수의 체계적인 육성 및 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공연에 앞서 10월 1일 용산아트홀 미르홀에서 ‘또 다른 가족과 함께하는 세 번째 이야기’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만났다.

 

▲현재 서원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부이사장, 한국무용연구회 이사장,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 / 이화여대 무용과 및 동대학원 졸업 / 1989년 윤덕경무용단 창단 /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협동 안무 / 주요작품 : <가리마> <빈산> <어~엄마 우으섯다> <더불어 숲> 외 다수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부대행사로 내달 선수촌 야외무대에서 ‘어~엄마 우으섯다’를 공연한다. 소개 부탁한다.
“97년 초연한 작품이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장애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드물지 않나. 또한 17년이나 지난 지금 사회적인 인식 또한 당시와 비교해 많이 바뀌었다고 본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조금 각색하고 수정해 공연한다.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식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장애인의 고통과 한을 춤으로 표현했다. 이철용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이 대본을 썼다. 초연 당시에는 장애인의 고통과 사회에서의 소외, 냉대, 무관심 등으로 장애인이 죽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어머니가 극복하고 씻김굿 등 춤으로서 상승돼 가는 장면을 그렸었다. 17년 전, 나만해도 장애와 예술을 어떻게 같은 선 위에 둘지 고민이 많았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장애인의 어려움을 포용하기에는 우리 사회 또한 서툴렀던 때이다. 그래서 장애를 숨기고 쉬쉬하고 아닌 척하는 게 당시 사회분위기였다. 그래서 그것을 두꺼비놀이를 하다가 압사를 당해 아이가 죽는 것으로 사회현실을 내비췄다. 그땐 비장애인이 장애인처럼 몸짓을 해 무대를 이끌었지만 이제는 아시다시피 비장애인과 더불어 장애인무용수들이 어우러져 함께 무대에 오른다.”

-작품이 어떻게 각색됐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장애아이가 신체적으로는 제약이 있고 정상생활은 힘들지만 스스로 아주 떳떳하며, 주변과도 잘 어울리며, 아이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배경으로 수정했다. 이 시대에 맞게 수정했다. 장애인무용수들은 총 11명 출연하며, 일반무용수는 28명이다. 17년 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엄마 역할로 출연한다. 특히 당시 출연진 5명이 이번 공연에도 다시 올라 의미를 더한다.”

-장애인을 소재로 작품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매너리즘에 빠져 무용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던 때였다. 그때 우연히 장애인소재 작품을 제안 받았는데 당시 나로선 전혀 상관없는 소재로 느껴져 망설여졌다. 계속되는 설득 끝에 무용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좋은 창작 작품을 올리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작품을 시작했다. 그런데 장애를 주제로 작품을 하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야하는 게 순서이지 않나. 시각장애인을 모시고 개최한 세미나에도 참석하는 등 장애라는 것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점차 내가 그들을 이해해가며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 손가락에 비접 하나 들어가도 그렇게 아프고 불편한데, 그들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하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스레 깨닫기도, 반성하기도 하며 말이다. 그렇게 1년간 장애인에 대해 공부하며 알아가며 장애인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내가 힘쓰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장애’를 주제로 작품을 한다했을 때 주변에서 의아해하지 않았나?
“공연을 올리고 났더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름을 알리려는 욕심으로 저런 작품을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리곤 했다. 반면 내게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는 분들도 계셨다.”

-장애인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해 대학로에서 종로5가까지 직접 휠체어를 타고 가보기도 했다고 들었다. 어떤 경험이었나?
“작품을 올리기 전 사전 공부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관객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든다. 또한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 살아가기에는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더군다나 그 구간은 시설이 잘 돼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마로니애에서 종로까지 얼마나 가깝나.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려니 1시간이나 걸렸으며, 낮은 턱 하나도 내겐 너무나도 높게 느껴졌다. 이런 체험과 관련해 이후 제자와 함께 나고야에 가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하고 또 수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런 후에야 작품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문무용수가 아니고 신체활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지도하고 있다. 그들과의 마찰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가르치다보니 처음 계획보다 동작을 점점 줄여야할 수밖에 없더라. 또 보다 단순화 시키는 과정이 이뤄졌다. 장애인과 일반인이 같이 할 수 있는 동작들을 추가하는 등 지금껏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니 내겐 일종의 모험과도 같았다. 특히 함께 참가하는 장애인들이 처음에는 자기들을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꼭두각시처럼 무대에 올라 동작 몇가지 하며, 의무적인 박수나 받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겠다고 내게 말했다. 나 역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진정 어우러지는 것이 목적이며, 장애인이라 배려하거나 하지 않고 일반인과 똑같이 대우하겠다고 하니 오히려 참가 장애인들이 적극적으로 임하며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3개월가량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전에는 그들의 동요, 의심이 있었지만 서로의 진심을 통해 다 해결되더라. 특히 그들 중 한 분은 암 투병 중이었는데, 그 사실을 숨기고 연습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전해 듣게 됐다. 자신이 그만두면 ‘장애인이 다 그렇지’ 하는 말을 들을까봐 투병 사실을 감췄다는 거다. 그만큼 그들이 작품에 대한 열정과 무대를 위한 노고가 대단했다는 뜻이다. 처음 계획은 4명의 장애인만 오르기로 했지만, 결국은 전원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장애인들의 가족들마저도 무용은 무슨 무용이냐며 콧방귀를 뀌고 믿지 않았지만, 무대를 보고서는 다들 감동하고 감명 받았다고 하더라.”

-장애인들을 지도하며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거라 예상된다. 여러 제약, 한계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고 있나?
“장애인과 무용 공연을 준비하면서 막막함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공연장 10개 중 1개에나 겨우 장애인 편의시설이 설치돼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곳에는 그런 시설이 전무한 상태였고 그러다보니 공연은커녕 접근, 입장조차 불가하니 좌절감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기본조차 안 돼 있으니 말이다. 단순히 소재만으로 다루기에는 내가 너무도 많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장애인 문화예술을 위해 내가 뛰어들 때라고 말이다. 그게 2010년의 일이다. 당시 고민이 많았던 내게 우연히 휠체어를 탄 한 여대생이 날 찾아왔다. 자기가 미국에서 몸짓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꿈같았는지 모른다며 날 찾아온 거다. 그 학생을 가르치며 내게 다시 한 번 의욕을 불태울 계기가 생겼고, 그 학생을 시작으로 여러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됐다. 그 학생이 연결한 2명을 비롯해 총 11명의 장애인이 모여 무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장애인들의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내가 일일이 그들에게로 직접 찾아가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6개월여 간의 연습을 거쳐 올린 작품이 바로 ‘하얀 선인장’이다. 잎도, 꽃도, 줄기도 없지만 선인장 그 자체 하나만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장애인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일 년에 딱 한 번 꽃 피우는 선인장이지 않나.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즉 한순간의 무대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장애인들의 열정을 담아 작품을 올렸다.”

▲하얀선인장의 한 장면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과가 있다면 알려 달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자체 평가에서 장애인무용수들과 올리는 무대를 최고의 공연으로 선정하며, 장애학생들을 위한 무용교육 실태에 대해 물어온 적이 있다. 공연무대를 목적으로 이뤄지는 무용지도가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성과를 지닌 것을 알기에 그때를 계기로 지난해부터 서울여고 등 서울시 내 고등학교 특수학급 몇 군데에서 장애학생들에게 무용을 지도해오고 있다. 내가 직접 방과후수업이 아닌 정규수업으로 내달라고 요청했더니 학교 측에서도 너무 좋아해주더라. 이렇게 학교로 직접 찾아와 교육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모습에 정규수업으로 흔쾌히 편성해줬다. 그래서 작년 말 장애학생들과 ‘푸른 공기의 춤’이란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꾸준히 장애인들과의 공연을 통해 그들의 의욕, 자부심, 긍지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용을 하며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건강해졌다며 말씀해주시고 그런 열정과 의지를 주변에 확산시켜주시며 다른 장애인들의 참여를 도와주시는 모습들을 보며 나 또한 의지와 영감을 얻고 있다. 예전에는 공연을 위한 무용지도였다면 이제는 그분들을 가르치고 함께 하며 얻는 보람이 훨씬 더 크다.”

-장애인문화예술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는지?
“5년 전, 문체부에 장애인체육과가 개설되면서 장애인복지에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생겼기에 고무적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장애인무용교육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은 어려운 상태다. 우리나라도 장애인예술가, 장애인무용가를 본격 육성해야 한다. 무용을 너무나도 하고 싶어 하는 장애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많다. 현실적으로 어떤 무용학원에서 장애인을 맡아주겠나. 정식 장애인무용교육환경이 조성되고 교육기관이 설립돼야 할 때이다. 장애인들만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함께 가야 발전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문화 예술이란 건 공유하고 공감하는 열정이 오가며 교류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점점 더 많은 지원이 이뤄질 거라 기대하며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올해로 춤인생 40년을 맞이했다. 소감 한 말씀해 달라.
“특별한 의미나 계획은 없다. 그저 좋은 공연 올리려 노력하면 관객이 알아주고 보러 와주고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더욱 더 힘써보려고 한다.”

-꿈은 무엇인가?
“장애인무용을 꿈꾸는 아이들 육성에 관심이 많다. 장애인무용 교육을 체계적으로 확립하고 전문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 내년에 장애인문화센터가 개관할 예정인데, 그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어떤 교육을 해 나가야할지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