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기행-120]사람냄새 나는 최규하 대통령 가옥
[박물관기행-120]사람냄새 나는 최규하 대통령 가옥
  • 이정진 Museum Traveler
  • 승인 2014.10.2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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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처럼 많은 것을 추억으로 얘기하는 절제와 반추

스스로 택한 권좌가 아니었기에 자만이 있었을 리 없고, 스스로 뚫은 길이 아니었기에 마음에 평온이 있었을 리 없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이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심 없이 그리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해보려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온 그런 나날들이었다. -중략-(조선일보 1980년 8월 17일)

▲최규하 대통령 가옥 외관

재임기간 9개월의 대한민국 10대 대통령인 최규하 전 대통령(1919~2006).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짧았던 청와대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그의 가택은 2013년, 그의 삶과 생애를 기록한 문화재 413호에 등재됨으로서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향긋한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서교동 작은 주택은 안식처와도 같은 모습으로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외부인을 손님처럼 맞이한다. 내노라하는 지역의 으리으리한 대 저택이 아닌 주민 센터 앞 평범한 가택에는 한가로이 낙엽들만이 날리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가옥과 마당의 모습

이곳엔 대통령이란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냄새가 나는 소박함이 묻어있다. 가택은 지하 1층까지 사용된 생활공간을 비롯한 3층으로 내부는 물론 70년대부터 2000년도까지 사용되었던 약 500개의 생활유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이 그의 청렴했던 삶을 담백하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손님이 오가는 중요한 자리였던 1층 응접실은 너무 협소하여 손님 몇 사람만 방문해도 다 앉을 수 없었다. 공적인 업무가 오갔던 작은 응접실임에도 비좁을 만큼 검약한 공간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삶의 편린으로 그를 대신하고 있다.

▲1층 응접실                                                     ▲2층 서재

땀띠가 심했던 막내딸을 위해 1953년에 구입한 선풍기, 큰 아들이 1970년 미국서 쓰다 들여온 에어컨, 애연가였던 본인의 다양한 재떨이......,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 많은 사연과 따스함을 간직한 물건들이다.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어나는 선풍기는 스위치를 켜면 ‘어제까지도 쓰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해 정겹다. 거실의 바닥과는 다른 장판이 깔린 작은 부엌엔 차를 대접하는 고급스런 식탁이 놓여 있다.

대통령이 직접 쓰던 소품과는 격이 다른 식탁과 찻잔에는 방문한 이를 존중하고 극진히 대접하려는 마음이 담겨있어 따스하다. 그래서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당신의 식사는 지하실 평상에서 하셨다. 좁은 문으로 고개 숙여야 지날 수 있는 지하엔 대통령 내외의 식사를 준비하던 부엌이 있다. 오랜 세월에도 반질반질한 그릇장과 소반들. 솔가지로 만든 수세미며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양은냄비들은 여느 집 가정처럼 소담하지만 따뜻한 밥을 차리던 식사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대통령 내외가 식사를 했던 지하 부엌

지하실 한 칸엔 또 하나 사연이 담긴 연탄 보일러실이 숨어있다. 1978년 국무총리시절, 강원도 장성탄광 시찰 중 광부들의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현장을 본 후 평생 연탄을 때겠다며 약속을 한 그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연탄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연탄마저도 절약하며 사용하였다는 점은 국민의 고통도 함께하고자 한 참 지도자상(像)을 보여주고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함께 교훈을 주고 있다.

2층은 그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상과 가옥 내 진입이 금지 된 부분까지 볼 수 있는 아카이브 스크린이 있다. 옛 자녀 방에 자리 한 유물들은 부부의 절약정신이 잘 엿보인다. 아들의 월급봉투에서 모인 1원짜리 동전들을 모아 지폐로 바꾸었을 정도로 근검절약했다던 영부인 홍기여사의 작고 낡은 동전지갑, 애연가였던 대통령의 가장 값싼 담배 ‘한산도’, 갈색 종이 상자의 골판지를 오려 자필로 위치를 적어놓았던 열쇠들이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상기 시킨다.

▲홍기여사의 간병에 쓰였던 탕약기들                  ▲지난 달력을 오려만든 메모장

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거실 옆으로 발코니가 있다. 퇴임 후 돈과 시간이 아까워 골프와 같은 취미생활도 하지 않고 화초와 분들을 가꾸었다는 그의 향기어린 공간에는 오랜 사용으로 녹이 슬었지만 손때 묻은 분재용 가위며 삽이 주인의 온기를 아직까지 간직 한 채 가지런히 잘 놓여있다.

좌우명 ‘유근유공(惟?有功) - 부지런한 노력만이 그 공을 인정받는다.’ 는 말은 늘 성실함을 강조했던 공직자상과, 세 아이의 아버지로 또 한 여인의 지아비로 모범을 보이고자 했던 강직한 의지가 서려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달 22일은 최 전 대통령이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마감한지 8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람을 사랑하던 한 지도자의 인간적인 삶이 가을의 깊이만큼이나 절절한 10월, 서교동 최규하 전 대통령 가택은 반가운 손님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를 추억하게 하는 기념박물관으로 남아 가을빛으로 우리들을 물들이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 가옥(http://yeyak.seoul.go.kr)
위치_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7-5/문의_ 02-2133-2640

이정진 Museum Traveler(wumolong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