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가야금 명인 황병기(이화여대 명예교수)]후세에 기억되고 싶지 않은 大家, 오늘날 기억되다
[인터뷰 - 가야금 명인 황병기(이화여대 명예교수)]후세에 기억되고 싶지 않은 大家, 오늘날 기억되다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5.01.0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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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손질해온 가락 드디어 결정체 음반으로

인터뷰를 위해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 댁을 찾았다. 북아현동 언덕 윗자락에 위치한 그의 집은 하얀 순백색이다. 초행길이었지만 아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 사전 약속 통화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준 덕택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경도 찾을 수 있’게끔 지표와 거리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명확하고 정결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 1959-1963 서울대 음악대학 강사, 1974-2001 이화여대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 1986 미국 하버드대학 객원 교수, 1990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가, 2006-2011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 1957 KBS 전국국악콩쿠르 최우수상, 1974 한국영화음악상, 2002 방일영 국악상, 은관문화훈장, 2006 대한민국예술원상, 2010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이달 초,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 음반이 발매됐다. 산조란 본디 신명 넘치는 즉흥 연주의 비중이 크기 마련인데, 황 명인의 가야금 산조는 오히려 즉흥성을 지양하며, 치밀한 구성미를 지녀 정제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번 음반은 그 정수라는 평이다. 이 음반에 실린 ‘짧은 산조 1’과 ‘짦은 산조 2’에는 도입부 격인 다스름과 혼합박자로 매우 빠른 10박인 엇모리장단이 없는 게 특징이며, 보너스로 짧은 산조 별가락(진양조)을 수록했다.

황 명인은 그간 심상건, 김취란(성금연류), 김병호, 원옥화(강태홍류), 김죽파, 함동정월 등 여러 선생에게 산조를 배우고 채보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전공 산조는 변함없이 늘 정남희 산조였다고 말한다. 지난 30여 년에 걸쳐 가락을 손질하고 보충해 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단모리 등 총 8악장으로 이루어진 산조를 완성한 것이 바로 이번 음반이다. 이번 음반에 정남희제라 이름 붙인 것은 약 40분에 이르는 그의 본바탕 가락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며, 황 명인은 이에 다스름 등을 더 하고, 유기성을 보완해 온전한 하나가 되도록 손질했다. 새로 보충된 가락은 황 명인이 북한에 가서 직접 공수해 온 정남희의 산조 테이프에 녹음된 것 중 고른 것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추가하기도 했고, 극히 소수이지만 불필요한 걸 빼기도 하고… 어찌됐든 내 마음에 들게 만들었더니 총 70분이 되더군요. 이는 현행 가야금 산조 중 최대 규모입니다.”

음악사 최초 현대 가야금 곡 ‘숲’

1962년 작곡한 ‘숲’은 황 명인의 첫 가야금 곡이자 우리 음악사 최초의 현대 가야금 곡으로 기록된다. 당시 문학, 미술 등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새로운 시도와 현대적인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국악에서만큼은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가야금 창작곡에 제일 먼저 앞장 선 이는 황 명인이었다. “그 당시 전통하는 분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어요. 내가 하는 게 아예 뭔지도 몰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날 욕하거나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지요. 다만 이건 내 유추인데,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들이 내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예전에 음악 감상실이라고 있었죠? 고전서양음악을 감상하는 일종의 다방 같은 곳 말예요. 대부분 클래식음악만 틀어주는 분위기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내 음악을 틀어주곤 하더군요. 또 클래식라디오에서 느닷없이 내 음악이 나올 때도 있었고요.”

민족음악 연구자 앤드루 킬릭 교수는 그의 음악을 두고 ‘모순을 명상하는 선禪의 경지’라고 표현했다. 황 명인은 단순히 우리 고유의 소리를 넘어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었다고 일컬어진다.
“74년에 침향무를 작곡하면서 범세계적이라기보다 범아시아적인 음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실제로 침향무도 74년 유럽투어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초연됐었죠. 그때 내 무대를 본 음악가들은 아시아, 서양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음악처럼 들린다.’라고 말하더군요. 2012년 국립발레단과 협업할 때 프랑스안무가가 ‘비단길’ 안무를 짜면서 한 말이 ‘듣고 바로 반했다.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였습니다.”

앤드루 킬릭 “황병기, 모순을 명상하는 선禪의 경지”

범아시아적인 음악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그의 음악이 세계를 아우르는 것에는 틀림없다. 그의 첫 음반은 미국에서 발매됐다. 1965년 하와이에서 녹음한 ‘코리안 트레디셔널 뮤직 가야금, 병기 황’은 LP로 발매됐다. 지극히 한국적임과 동시에 세계인의 감성을 아우르는 그의 독특한 선율은 곧바로 주목받아, 초기 작품 중 하나인 ‘가을’은 훗날 동양음악에 관한 미국라디오프로그램의 주제 선율로 사용되기까지 했으며, 미국 음반비평전문지 ‘스테레오 리뷰’는 황 명인의 음악을 ‘초스피드 시대의 세계에 해독제로서 특별히 가치 있는 음악’이라고 평하며 별 다섯 개 만점을 줬다.

민족음악 연구자 앤드루 킬릭 교수가 쓴 책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를 황 명인이 직접 들어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출신 추상화가 에버하르트 로스가 ‘산조’라는 제목으로 청담동에 위치한 JJ중정갤러리에서 황 명인을 위한 헌정 전시를 가지기도 했다. ‘비단길’과 ‘춘설’을 듣고 큰 울림을 받았다는 이 화가는 황 명인의 음반을 접하고는 일순간 빠져들게 돼 황 명인의 음악을 화폭으로 표현하기에 이른 거다. 쉽게 말하자면 팬fan인 셈. 이건 그저 보통 팬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헌정전시 ‘산조’ 소식을 들었을 때 황 명인은 너무나 고맙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참 재밌는 일이에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두어 달 전쯤, 이러한 전시를 하겠다며 연락이 왔고 그때 처음 만남을 가졌지요. 풋내기도 아니고 한창 활약 중인 50대 화가가 내게 진심을 전하는데 좋지 않을 수 있나요. 보아하니 작품이 품격 있고 그 수준이 있습디다.”

더불어 지난해 영국 SOAS대에서 민족음악 연구자 앤드루 킬릭 교수가 낸 영문 연구서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가 우리말로 번역돼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이는 전문적인 서적으로, 동양음악가 중 영어로 쓰인 연구서가 나오는 건 세계 최초이다. 올해 이래저래 기념할 일이 많다며 대가大家는 웃었다.

‘미궁’,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안 팔린 곡

포털사이트에 황 명인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 상단에 ‘황병기 미궁’이 꼭 빠지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도 황병기는 몰라도 미궁은 안 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인터뷰를 하면 이 질문이 빠진 적이 없어요. 미궁에 대한 질문들을 꼭 하나씩 하죠. 75년에 발표된 게 미궁인데, 40년이 지나도록 괴소문부터 별 해괴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돌만큼 유명한 곡이지만 더 재밌는 것은 내 음반 중 가장 안 팔린 게 바로 미궁이라는 겁니다. 가장 유명하지만 판매가 가장 부진한 음반이라는 거죠. 이게 더 흥미로운 사실 아닙니까?”

‘미궁’은 1975년 현대무용가 홍신자와 함께 초연했던 17분가량의 작품으로,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 막대)로 가야금을 긁고 찌르고 두드리기도 하고, 신문 기사를 읽다가 마치 울고 웃고 절규하듯 변하는 목소리 등이 삽입돼 있다. 오늘날 들어도 그 실험성과 전위성이 두드러지는 이 곡은 그 당시 충격 그 자체였다. 황 명인의 곡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금의 전통적 음향을 전혀 들을 수 없는 곡이며, 게다가 웃음과 울음, 신음 등 인간의 목에서 튀어나오는 원초적 소리를 ‘날것’ 그대로 담아내 1975년 명동국립극장 초연 당시,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고 소리치며 연주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후문이다. 또한 당시 정부로부터 연주금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들어서며 인터넷문화가 보급되며 ‘3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 ‘이 곡을 듣고는 이미 3천명이 죽었다’ 등 웃지 못할 괴소문이 다시 되살아났다. 심지어 이러한 루머를 확인하고자 하는 중고등학생들이 황 명인의 홈페이지에 몰려와 온갖 억측을 쏟아놓는 바람에 한때 홈페이지를 폐쇄한 적도 있다고.
“언제인가는 항의전화를 받은 적도 있어요. 왜 이런 걸 만들어 애들을 놀라게 하느냐며… 어떤 학생은 이메일로 내게 ‘미궁을 벌써 2번 들었는데, 한 번 더 들으면 죽느냐’며 묻길래 내가 그렇다고 답한 적도 있지요. 60년 후쯤에 그렇게 될 거라고요.(웃음) 이건 내가 직접 들은 건데, 군대에서 담력을 기르라며 새벽 3시에 틀어준 적도 있다더군요. 내 입장에선 어찌 보면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에요. 사람이 태어나서 떠나기까지의 주기를 표현한 건데…”

2006년부터 6년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 감독을 지내는 동안 황 명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는 ‘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를 꼽는다. 네 줄기는 기독교, 불교, 도교, 무교 등 네 개의 종교를 뜻하는데, 4명의 작곡가에게 각각의 곡을 의뢰해 올린 것으로 획기적인 공연으로 기억된다. 또한 국악칸타타란 이색적인 형태의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도 황 명인은 덧붙였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국악연주자 60여 명, 서양악기연주자 20여 명, 합창단 20여 명 등 130여 명이 나서 국악 연주 사상 최대 규모로 웅장한 무대를 선보인 것으로,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성에서도 합격점을 받으며 국악관현악단을 각인시키는 공연으로 주목 받았다.
“완전히 예술적이거나 혹은 완전히 대중적이거나 하는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죠. 우린 국립이기에 민간에서 할 수 없는 극히 예술적인 것과 동시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국민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도 간과하지 말아야 했어요.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무대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의 요청에 황 명인은 직접 가야금 한 곡조를 들려주기도 했다.

내년 요코하마, 마지막 해외 공연될지도

황 명인은 내년 1월 29일 성남시립국악단과의 공연과 5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릴 한일교류음악회를 앞두고 있다.
“내 최초의 해외공연이 일본에서였는데, 그 마지막도 아마 일본이 될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미국, 유럽 등의 공연은 내가 다 거절하고 있더군요. 너무 힘들어서요. 국내 공연은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할 생각입니다.”

대가에게 으레 묻는 질문이 있다. 훗날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의 마지막 대답은 그가 타는 가락과도 꼭 같았다. 명료하면서도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어떠한 인물로든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그를 우리가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후기를 보면 자기 시는 후손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후대 사람들에겐 가치가 없을 것이라면서요. 그 말이 참으로 와 닿아요. 뭐, 내가 저절로 기억될 순 있겠지만 내가 어떤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나 죽으면 무덤도 비석도 다 필요 없다고 단단히 말해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