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조각가 최진호(서울미술협회 조각분과 이사)]‘해치 작가’, 국내 넘어 세계로… 정의와 평화의 세상 꿈꾼다
[인터뷰 - 조각가 최진호(서울미술협회 조각분과 이사)]‘해치 작가’, 국내 넘어 세계로… 정의와 평화의 세상 꿈꾼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5.01.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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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로비에 <웃는 해치> 제막, 국내 작품으로는 최초 설치

해치獬豸, 또는 해태라고도 불리는 상상의 동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 대사헌의 관복에 이용되는 등 사헌부 상징으로 쓰였다. 또한 법치와 정의를 상징하기도 하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는 단지 화마뿐 아니라 온갖 나쁜 기운을 막아줌과 동시에 행운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존재로서, 2008년에는 서울시의 상징물로도 선정됐다. 이런 해치를 주제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최진호 작가. 우리가 서울시청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익숙한 그 해치상도 바로 최 작가의 작품이다.

현재 서울미술협회 조각분과 이사 / 중앙대 조소과 및 동대학원 조소전공 졸업, 호주 국립대학교 조소과 석조 Artist Residence Program / 작품소장처 : 국제사법재판소, 조선호텔, 서울시청사 다산홀, 호주국립대학, 대한주택공사 충남 아산배방지구, 강원도 화천 토마토조각공원, 천안아산역광장, 노원구 천상병시인 시비 외 다수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최 작가의 <웃는 해치>가 설치됐다.

외교부는 지난해 1월, 국제사법재판소에 우리나라 예술품을 기증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공모전을 실시한 바, 최 작가의 <웃는 해치>를 기증품으로 선정했다. 이곳에는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이 기증한 예술품이 전시돼 있으나 우리나라 작품이 비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국제사법재판소 1층 중앙홀에서 법정으로 가는 방향의 첫 창문 앞에 설치돼, 국제사법재판소가 위치한 평화궁 방문객은 물론 법정으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면서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100여 년 전, 이준 열사가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무효,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무려 3개월에 걸쳐 입국했으나 일본의 치졸한 방해공작으로 결국 실패로 그치고 만 우리의 울분의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해 이번 작품설치는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던 이준 열사를 당시 광화문에 위치해 있던 해치상은 모두 지켜봤을 것이라고 최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어느 새벽, 광화문을 걷던 최 작가는 문득 그때의 해치상과 자신이 교감한다고 느꼈다고. “그 당시 모든 것을 지켜보며 해치상은 아마 이준 열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내가 다 기억하겠노라고… 제가 그때 술기운이 올라 그랬던 건지(웃음) 어찌됐든 해치상과 나 사이에 그 어떤 필연, 혹은 운명적인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야 그걸 실현하는 듯합니다.”

올해 초, 외교부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증할 작품을 공모한다고 밝혔을 때, 해치상을 주 작업으로 이어오던 최 작가는 때마침 법과 연관성이 강한 해치의 상징적인 의미가 국제사법재판소와 잘 부합한다고 여겼고 공모전에 출품한다. 외교부 역시 최 작가의 해치상이 장소성과 당위성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해 그의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
“<웃는 해치>라고 제목을 지어 평화의 의미를 담았어요. 외적으로는 전통 민화에서 차용한 꽃, 새, 나비 등을 새겨 넣기도 했죠.”

지난해 6월 최종 선정 후, 작품 설치를 위해 그는 헤이그로 사전답사도 다녀왔다. 작가 개인으로서는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겠으나, 한 편으로 그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07년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 지원요청을 위해 헤이그로 떠났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특사단의 억울함과 통탄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나는 고작 12시간 비행기 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 당시 얼마나 어렵사리 목숨을 걸고 그곳까지 간 건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울분이 내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하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작품은 국제사법재판소 로비에 설치됐다. 작품 공개 전까지는 색동조각보로 작품을 씌워놨다고 한다. 특히 너비 1.3m, 높이 1.5m에 육박하는 화강암 조각으로 그 무게는 어마어마할 것인데 네덜란드 전문운송업체는 최신식장비를 두고도 우리 전통방식인 삼발이로 작품을 설치했다.
“원체 무게도 무거운데다가 거기에 실내 설치다보니 크레인도 못 들어가서 굉장히 난처해하는 상황이었어요. 우리 측에서도 설치전문가를 데려갔었는데 삼발이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현대장비로도 불가능하던 것이 삼발이로 손쉽게 이뤄지니 네덜란드 사람들이 다들 놀라했죠. 무지 신기해 하길래 결국은 선물로 주고 왔어요.(웃음) 우리 전통방식으로 설치했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활 쏘기가 취미인 최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황학정 내 위치한 국궁전시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초기에는 인물상 위주로 작업을 이어오던 그가 해치에 몰두하게 된 것은 2000년 호주대사부인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우연히 나눈 몇 마디 대화 중 우리나라 해치상에 대해 그녀가 물었고, 문득 든 궁금함에 해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이어져 온 것이란다. “해치를 작품화한 작가는 없고, 대부분 석공들이 장식품 정도로만 만드는 해치가 전부더군요. 해치를 보다 재밌고 현대적으로 풀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죠. 저는 신나서 만들긴 만드는데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 서울시가 해치를 시 상징물로 지정했고 해치상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서울시청과 한남대교 두 부문으로 나눠 공모했는데, 충정로에서 나고 자라 정동길이 친숙한 저는 서울시청 앞에 설치되길 바랐고 이뤄낸 거죠. 솔직히 작업을 이어오면서 매너리즘과 회의가 들 때가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한 계단 올라서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에게는 이색적인 이력이 있다. 대학생 때 조각 외에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델라인이라는 대형모델전문회사에 들어가 심은하, 고현정 등 유명 배우들과 함께 삼성전자, 대우전자, 캠브리지 멤버스, 프로스펙스, 맥스웰캔커피, 해태제과 등 다수의 브랜드 모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조각이나 모델이나 모두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도움을 줬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다가 모델일이 너무나 많아져서 오히려 조각을 할 시간이 줄어들어 모델은 그만두게 됐단다. 모델로서 카메라 앞이나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고 만족감이 컸고, 조각은 조각대로 작품을 만들고 완성돼 설치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은 모델일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만족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모델일을 하며 얻은 경제적인 수입 덕분에 조각에서의 재료 선택에 있어서 위축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최 작가의 부인은 호주인으로 강화도 석모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주한호주대사관 교육과학참사관으로 부임한 그녀는 한국에 온지 한 달도 안 됐을 때였다고 한다. 우연한 만남에서 국제결혼까지의 이야기도 재밌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장인 또한 작가라는 사실. 지난해 작고한 호주의 원로 화가 로버트 리디코트가 바로 그의 장인이다.
“자전거 타다가 쉬면서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제가 조각을 한다고 했더니, 자기 아버지는 화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2003년에 결혼했어요.”
그는 장인어른이 생존해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호주장인·한국사위’를 타이틀로 2인전을 수 번 함께 했다. 장인의 평면그림과 최 작가의 조각을 한자리에 전시에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단풍을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한국 오셨을 적에 오대산 등을 모시고 다니면서 구경시켜드렸죠. 재밌는 기억은 우리나라 재래시장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파라솔 있죠? 그것에 영감을 받아 그 파라솔이 들어간 작품도 하시고 심지어는 하나를 직접 구입해 호주로 사가지고 가셨어요.(웃음) 이렇게 강렬한 색감이 있느냐며 인상 깊다고 하시면서요.”
한국에서의 2인전은 그가 제안해 이뤄진 것이었다. 또한 故이대원 화백과의 자리도 주선해 교류 기회도 마련해드렸었다고. 언어로서의 소통은 어려웠는지 몰라도 미술을 하는 서로의 동료의식과 공감대 덕분에 그 어떤 장인사위 사이보다도 각별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돌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스틸 등을 재료로 한 새롭게 변형된 해치를 선보이고 있다. “화려하게 색칠을 한다거나 또는 한지나 옻칠 등을 병행하기도 하고요. 시대에 맞게 재질도 변형을 주고 형태도 다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한 단순화 시킨다든지 하는 점차 변형된 이미지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요. 과거에는 돌이 발달했다면 현대에 와서는 제철이 발달했죠. 그래서 이에 따라 스틸주물이나 브론즈로 작업을 이어가고 싶기도 합니다. 재료비가 많이 들어서 문제지만.(웃음)”

그는 앞으로 해치 외에 다른 동물을 주제로 조각해볼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광화문 해치상을 보면 호랑이가 떠오르곤 해요. 그래서 호랑이나 고양이로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습니다.”
요란한 작품을 하기보다는 작은 조각조각들의 모여 완성체가 돼 간다는 느낌으로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최 작가는 국내에 국한되기 보다는 해외로 나가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덧붙인다. 그의 해치가 세계 각국에 설치돼 그가 꿈꾸는 평화와 정의의 세상이 실현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