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구의 음악칼럼] “드뷔시-가라앉은 사원”
[정현구의 음악칼럼] “드뷔시-가라앉은 사원”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코리아 네오 심포&
  • 승인 2015.01.0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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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19세기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근원적인 사상을 넓히는 시기였다. 이 사상들은 여러 방식으로 확대되고 수정되며 발전되었다. 화성적 기능, 불협화음의 사용, 선율적ㆍ화성적 구성이 확대되고 변화되면서, 이전 시대에 확립된 주요한 기본골격을 무너뜨리지는 않으면서 전혀 다른 소리를 내게 되었다. 19세기 음악은 거의 200년 동안 존재해왔던 선율적ㆍ화성적 원리에 의존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의 가장 뛰어난 피아노음악 작곡가인 쇼팽의 수많은 작품들은 19세기 후반의 음악 작품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의 작품은 피아노의 기술적 사용과 화성ㆍ선율의 구조에 있어서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바그너는 화성적 원칙을 재정립하여 그 이전의 작곡가들이 사용했던 근원적인 기능적 체계의 확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음악적 공간(musical space)에 대한 개념과 활용방법에 있어서 심각한 지각변동들이 있었다. 이들 중 몇 가지 음악적 개념에 대한 확장은 음악적 음향의 재정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300년 이상 서양음악의 근본 토대를 형성해 왔던 두 가지 개념, 즉 조성과 화음의 기능이 의문시되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조중심(key centers)과 화음 대 화음의 기능성(chord to chord functionality)에 대한 고유의 생각과 방법들이 상당히 변화되었다.

특히 바그너가 사용한 조성은 너무 유동적이고 조성감이 약화되어진 결과, 하나의 조(key)는 다음의 또 다른 새로운 조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거의 암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이 조성을 극한적인 상태까지 몰고 갔으며, 그 결과 두 가지로 구분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첫째는 전조(modulation)가 거의 일어나지 않고 하나의 견고한 중심음(tonal center)이나 음계를 고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풍부한 반음계어법을 사용하면서 하나의 특정적인 중심조성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드뷔시(Claude Deussy, 1862~1918)의 작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의 스트라빈스키, 라벨, 바르톡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특정적인 화음기능에 나타나는 변화는 작품의 음향과 진행에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한 화음구조들이 20세기 초반의 음악에서, 특히 드뷔시의 음악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화음구조를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작품의 음악적인 요구조건들에 따라 결정된다. 추상적으로 이들 화음들은 특별한 음악적인 의도를 갖지 않는 단지 음향 그 자체들이다. 그러므로 드뷔시가 구사하는 화음들은 항상 유동적이다.

드뷔시의 화음들은 작품 내에서 그의 의도에 따라 기능적으로 혹은 비기능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면은 그의 작품 <가라앉은 사원(The Sunken Cathedral)>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성조직(3도에서 혹은 선율적으로 추출된)에 근거하는 단락들로 나눠진다. 각각의 화성조직은 특정적인 음향을 만들어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기능화성진행은 시도되지 않는다. 

드뷔시의 작품은 특정한 조성적인 기능이 아닌 음향(sonority)와 선(line)이 중요한 아이디어들이다. 드뷔시의 <가라앉은 사원(The Sunken Cathedral)>은 분명히 표제음악적인 의도를 지닌다. 이 이야기는 하루 중 어느 때면 고대의 가라앉은 사원이 물 위에 떠오르면서, 수도승들의 노래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내용이다. 드뷔시는 가라앉은 사원의 인상을 풍기기 위해서 음악적으로 여러 음향들을 만들었다. 일례로 넓은 간격을 가지는 음들로 구성된 시작부분은 거대한 사원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드뷔시는 어떤 음계도 작품에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음계를 쓰더라도 짧게 또는 악구의 기초로만 사용하였다, 지금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당나라 후반에 활약했던 한유(韓愈, 768~824)가 유명한 산문 ‘원도(原道)’의 말미에서 설파한 불파불립(不破不立: 깨뜨리지 않고 세울 수가 없다)를 상기한다. 이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참다운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