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민속예술인들과 소중한 만남 -1(1) '쑥대머리’의 명창 임방울
[특별기고]민속예술인들과 소중한 만남 -1(1) '쑥대머리’의 명창 임방울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1.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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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가객 문중의 후예로 태어나다

 

아직도 50-60대의 판소리 애호가들은 명창 임방울을 잊지 못한다. 쉰여섯이라는 비교적 짧은 일생이었는데도 그의 소리가 당시 조선팔도를 풍미하였으며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임방울의 본디 이름은 임승근(林承根)이며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오늘의 광주광역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광대의 계통이었던 외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당대의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외삼촌이니,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혈연으로서도 소리꾼의 후예라 하겠다.

소년 임방울은 열네 살에 박재실(朴在實)에게 춘향가와 흥부가를 배운다. 처음에는 소질이 없다며 소리 공부 포기할 것을 주위에서 일렀지만 그는 가정도 버리다시피 하면서 화순에 있는 만년사(萬淵寺) 등 명승대찰을 찾아 독공(獨功-판소리 따위의 득음을 위한 발성 연습)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첫사랑의 연인 월녀(月女)와 헤어지게 되는 등 시련이 계속되었지만, 오히려 공창식(孔昌植), 유성준(劉成俊), 김봉이(金鳳伊), 조몽실(曹夢實)의 문하를 거치면서 ‘득음’하였다.

급기야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 되던 해 외삼촌 김창환의 주선으로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 참가 ‘쑥대머리’ 로 입상하면서 일약 이름을 떨친다. 레코드회사인 ‘콜럼비아’, ‘빅터’, ‘오케’ 등이 앞 다투어 그를 전속으로 삼으며 판을 찍어 내더니 ‘쑥대머리’ 판이 나오면서는 아주 임방울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의 축음기 보급률로 볼 때 20만 장 이상을 팔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하겠다. 한편, 임방울이 인기를 독차지하기 시작한 1930년대의 후반으로 가면 전통적인 판소리 시대는 지나고 창극(唱劇)의 시대로 접어드는 때였다.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를 배역을 나누어 여럿이 분창(分唱)하며 꾸며대는 새로운 창극이 대중의 호응을 받으니 모든 소리꾼들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임방울은 몇 번 참여한 것 외에는 본격적인 판소리의 외길을 고집한다.

전통적인 소리광대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특히 화류 예기(藝妓)들이 그를 독차지하고자 온갖 유혹이 끊이질 않았으니 결국 평온한 인생을 누리지도 못했다. 숱하게 남긴 그의 일화 가운데 소리에 얽힌 한 토막을 소개한다.

머슴의 통곡

 

▲ 명창 임방울 옹

임방울이 서울에서 명성을 얻기 전에는 각 고을의 ‘난장’에 초청되어 소리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쑥대머리 솜씨는 이미 호남 지방에서는 알려져 있었으니〈적벽가〉한 마당이 끝나자 구경꾼들이 “쑥대머리! 쑥대머리!” 하고 재청을 청한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헝클어진 모습으로 산발을 한 춘향이가 옥에 갇혀 이도령을 애절히 그리워하는 ‘쑥대머리’가 물을 끼얹은 듯이 좌중을 고요케 한다. 소리를 엮어 나가는 임방울이 숨을 들이쉬면 좌중도 일제히 들이쉬고, 목청이 하늘로 치솟으면 좌중도 공연히 목을 길게 뺀다.

고수의 장단에 맞춰 임방울은 올렸다 내렸다, 힘을 줬다 풀었다…. 흡사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물아 굽이쳐 흐르듯이 자유자재이다.

이렇게해서 재창으로 부른 소리가 끝난 후 관객과 함께 ‘쑥대머리’를 다 마치니 좌중은 아쉽지만 하는 수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뿔뿔이 흩어진다.

임방울도 고수를 앞세우고 자리를 뜨려는데,한 더벅머리 총각이 철퍼덕 주저앉은 채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가보니 새끼 돼지가 든 망태기를 움켜쥐고 닭똥만한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다. 쥐고 있는 망태기를 보니 이를 어쩌랴 죽은 새끼돼지가 아닌가?

영문을 물은즉, “이 머슴 새경 받아 모아 놓은 곡식을 팔아 새끼 암돼지 한 마리를 샀겄다. 요것을 길러 새끼 내고 새끼 내서, 논밭뙈기 조고만치 장만하게 되면 장가를 갈 심산이었지. 그런데 임방울 당신의 ‘쑥대머리’를 듣는데 요 놈이 끙끙대길래 소리 못 내게 하느라 목을 쥐고 있다가… 당신 힘쓰는 대로 나도 힘을 쓰다 보니 고만 이 새끼돼지가 숨이 막혀 죽고 말았지라오…” 하며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렸다.

머슴이 통곡하는 까닭을 알게 된 임방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지전 한 주먹을 그에게 쥐어 주고 표표히 사라지고 말았다.

위의 사연은 아쟁산조의 창시자이자, 명고수인 정철호 님으로부터 들었는 바 요즘은 이처럼 판소리를 이해하는, ‘소리귀’가 있는 청중이 없다는 푸념 끝에 나온 이야기이다.

‘서편제’ ‘동편제’ 함께 부른 임방울

본명이 임승근인데 어찌하여 ‘방울’이란 예명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목구성’이 하도 뛰어나다 보니 이러한 이름이 붙지 않았는가 싶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청구성’에다, 약간 거친 듯 하면서도 구수하게 곰삭은 소리인 ‘수리성’을 겸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타고난 소리꾼이라 하겠다.

서편제란 구슬픈 계면조(界面調)를 이르고, 동편제란 우람한 우조(羽調)를 이르는데, 보통 가객들은 이를 한 유파로 삼아 구별하려 했으나 그는 그렇지를 않았다. 단 한 사람의 창자가 여러 배역을 맡아 1인 100역하는 것 판소리의 특성인데 어찌 서편제, 동편제를 가리느냐 했다.

그는 노랫말과 가락에 따라 장(壯一羽調), 한(閑一漫調), 화(和一平調), 원(怨一界面調)을 그때 그때 적절하게 구사했다. 어떤 이는 임방울의 소리가 계면조에 가깝다고도 하지만 그가 만년에 자주 부른 ‘적벽가’ 중의 ‘적벽화전(赤壁火戰)’ 대목을 부를 때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우조의 세계를 구가하고 있다.

판소리의 중시조라 할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판소리 가객의 4대 요건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들었다. 임방울은 이 네 요건을 고루 갖추었다.

‘인물’로 치자면 소시에 마마를 앓아 살짝 얽기는 했지만 시원한 자태였고, ‘사설’도 남다른 독공으로 난해한 한자까지 환하니 노랫말의 뜻이 명료히 전달되었다. ‘득음’이란 소리하는 법도를 터득함이요,‘너름새’란 아니리(대사), 발림(몸짓), 소리(창)가 적절히 조합될 때 느끼게 되는 가객의 풍모를 뜻하니 임방울이 바로 그였다.

유파를 초월하여 소리의 모든 창법에 통달했던 임방울은 토막소리라 할 창극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도 오로지 본바탕 판소리를 지킨 인물로도 길이 기억되리라.

임방울은 1961년 3월 8일 쉰여섯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장례식은 3월 10일 ‘국악인장’으로 치러졌다. 상여 행렬이 길게 길게 서울 한복판을 누비다가 시청 앞 광장에 이르자 국악인뿐만 아니라 그를 아끼던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상여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생전에 가장 가까웠던 연인 ‘김산호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그 유명한 느린 진양조의 구슬픈 노래가 한구석에서 은은히 들려왔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당신의 혼은 어디로 행하셨나요. 황천이 멀고먼데 그리 쉬베 가려는가….”

이렇게 하여 일세의 명창이요, 만인의 연인이었던 임방울은 몇 장의 소중한 그의 소리를 음반에 남기고 황천길로 떠나고 말았다.

 

 

   
    ▲ 우리마당 출판
<1994년 2월, 기은>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민속사학자 심우성 선생님의 이번 연재는 선생님이 그동안 인연을 맺어온 우리 앞 전 세대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을 다룬 글입니다. 이 글은 그동안 선생님이 여러 매체 등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한국민속극연구소반세기’란 부제가 붙은 <소중한 민속예술인과 만남>(우리마당 刊)이란 책으로 묶어져 나와 책의 내용과 사진 등을 옮겨 싣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오신 임방울, 만정 김소희..이동안 어르신 등 대부분 이미 작고하신 분들의 에술혼이 깃든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우리마당’ 대표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