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무용가 채상묵] 언제나 신인처럼 쉬지 않고 고민하는 작가
[인터뷰-한국무용가 채상묵] 언제나 신인처럼 쉬지 않고 고민하는 작가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정리 박세나 기자
  • 승인 2015.01.0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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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춤 발전 위해 현재와 과거 경계 허물어

채상묵 한국전통춤협회장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 이수자 / 현 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이사 / 서라벌예술대학 무용학과, 미국 pacific western university 체육학과 졸업,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석사취득 / 서울예술단 무용감독(2002-2004),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전통예술원 무용과 겸임교수 / 2010 제59회 서울특별시문화상, 2007 제21회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예술문화 대상, 2005 제19회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예술문화 공로상, 2001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인 선정, 1987 전주대사습 장원, 1979 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 장려상
채상묵 명인은 지난해 6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가 주최한 제3회 토크&댄스에 출연해 ‘천상의 몸짓’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량무를 통해 당시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오랫동안 각인되는 춤꾼으로 기억하게 했다. 본지는 진작 그를 지면에 초대해야 했으나 늦은 감이 많다. 신년을 맞아 그의 춤인생과 삶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지난 2009년, 채상묵 한국무용 명인은 그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채상묵 춤 50년의 향 - 예인의 흔적>을 공연했다. 한국 전통춤의 대표 입춤, 한량무, 승무, 살풀이춤, 오고무 등을 선보이며 50년의 춤 인생을 한 무대에 쏟아냈다. 예술가 특히 춤꾼은 무대에서 어떻게 평가 받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동안에 길렀던 제자들과 한 무대를 마련해 자신의 춤을 사랑해준 분들께 보은하고, 다시 평가받고자 50년 동안 춰온 춤을 압축해서 선보였다고 한다.

3, 40대 창작활동을 활발히 한 그는 스스로 한국 춤을 좀 앞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다보니 때론 선배들에게 질타도 받고 무용계에 이단자로 여겨진 적도 있었다고 말한다. “창작을 해도 한국 춤을 추니까 국악기로 편성해서 작곡을 하는데, 우리 악기 자체에서 내는 성음이 다 슬픈 느낌이어서 춤이 전부 서정적으로밖에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외국악기, 예로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것을 튕겨 저음을 내도록 요구하는 등 음악 하는 분들과 교류하며 작업했고, 결국 서정적 표현만 가능하던 춤들이 좀 더 역동적인 에너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양 음악에 한국 춤 접목 작업도 줄곧 했지요.”

섬세한 표현의 호남류 춤에 사로잡히다

채상묵 명인은 초등학생 시절 한국 발레계 대부 고 임성남 선생님 지도로 <꽃과 나비>라는 유희를 학예회에서 발표하게 된 것이 춤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이후 1975년 무렵 동료인 문일지(초대 서울시립무용단장) 제의로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이매방 선생(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제 97호 살풀이춤 예능 보유자)을 서울로 모셔와 춤 학습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호남류의 춤에 심취했다.

“흔히들 승무는 남자가 출 수 있는 춤이고 살풀이춤은 여자가 출 수 있는 춤이라고 하는데 호남류의 전통춤을 보면 굉장히 여성적 취향이 많아요. 살풀이 춤 같은 경우 본래 기방에서 나왔던 춤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교태미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추기는 조금 어려운 것은 사실이에요. 또 승무는 무게감 있고 굉장히 장엄한 춤으로, 춤을 오래 추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그 감성이 나올 수 없다고 인정됩니다. 모든 춤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호남류의 춤은 섬세하게 표현해야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 채상묵 명인의 한량무. 물 흐르듯 유려하고 힘이 넘친다.

채 명인은 전통춤이라는 것이 외형적인 것보다 자기의 감성이나 내면을 표현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후학들에게도 그를 강조한다고 한다. “춤의 형태는 선생을 보고 그대로 흉내 내 공부하면 되지만 감성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개발해서 창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구나 우리 춤이 굉장히 즉흥성이 요구되는 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스승의 춤을 그대로 흉내 내 추다가 순간의 신명에 의해 저도 모르게 다른 모습으로 표현이 될 때가 있어요. 그 모습들을 다시 또 재현하려면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한 스승 밑에서 수십 명이 춤을 똑같이 배우지만 다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지요. 결국은 자기의 특성들이 다 살아나기 때문에 춤이 변형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듯이.”

전통무용계 문제점 직시, 한국춤 발전 위해 협회 설립

현재 전통춤도 그 춤이 만들어질 당시 다 창작이었고 그 시대 생활 속 감성이나 몸짓을 미적 가치로 승화시켜 만들어낸 춤들일 것이다. 채 명인은 젊은 친구들이 한국 춤의 원형을 먼저 공부했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그러나 지금 체재가 입시과목인 창작무용 위주로 교육 되다보니 무용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전통춤보다 서양식 틀에 맞춰 교육받을 수밖에 없다. 채 명인은 입시교육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춤의 가치도 변화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입시할 때만 해도 기본 춤을 전통춤으로 봤는데 요즘은 창작무용을 주로 보지요. 무술이나 여러 외부의 것을 인용해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동작들을 표현하다 보니 겉 보기에는 화려하게 잘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구체화시켜 한국의 굿거리장단에 맞춰 움직여봐라 하면 못 움직입니다. 그래도 요즘 시험 과목으로 한국 전통춤을 보는 곳도 다시 생기기 시작합니다만 살풀이, 승무 다 수건을 들고 춘다든가 장삼을 입어야 하는데 그게 입시 때 약속이 되어 편법이 자행될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이 있기도 합니다.”

최근 한 콩쿨은 예선에서 전통춤을 심사하고 본선에 그 점수를 평가 반영하는 식을 도입해 점차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콩쿨 심사 자체의 문제점이 많다고 말한다.

▲ 한국무용가 채상묵(한국전통춤협회장)

“한국 전통춤에는 대통령상이 많이 있어요. 저도 두 번 심사를 갔는데, 그 다음부터 심사의뢰가 오면 안 갑니다. 인정되는 기량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점수를 줘야하는데 누구에게 점수를 줄 지 이미 약속이 다 돼있어요. 제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제가 도장을 찍지 않아도 통과가 될 정도니까요. 그런 부정적인 면들이 많아 요즘은 아예 심사 제의를 거절하는 편입니다.”

또한 각 시립 단체마다 단장으로 대부분 한국춤 전공자들이 많이 선정되는데 이에 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시립무용단에도 제대로 실력이 인정된 사람들이 가야 작업의 성과들이 있을 것이고 단원들과의 융화도 잘 될 텐데 그게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어느 시립무용단도 단장이 관계자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채용됐는데, 단원들과의 갈등 때문에 제대로 임기를 이행해 나가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단원들과의 교류가 되고 있지 않으니 그 단체 작품의 질적 향상을 우리가 기대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최근 국립무용단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외국인 안무자를 초빙하는 등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려는 행보를 좋게 보는 시각도 있고, 이로 인해 단체 내 예술 감독의 존재에 의문을 갖는 의견도 있다. 채 명인은 이에 대해 각자의 시각이 다른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외에 무형문화재 지정에 관한 문제도, 요즘은 근거 없는 춤으로도 지방문화재가 되는 상황 등 문제가 심각함을 느낀다고 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서양식으로 길들여지는 풍토와 비리가 난무하는 콩쿨 심사, 무형문화재 지정 문제 등 한국 전통 무용계에 팽배한 부정적인 면모를 극복하기 위해 채 명인은 3년 전 한국전통춤협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전통춤협회에서는 여러 전통 무용계 문제들로 세미나와 토론활동을 진행해 온 바 있다. 채 명인은 이에 대해 패널들을 모셔 자유롭게 토론했는데 아무래도 민감한 사항이기에 발언에 조심스러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장중하고도 섬세한 채상묵 명인의 승무

집착 없이 물 흐르듯 사는 삶, 대나무를 닮고 싶어

채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이매방 선생 춤을 누구보다 먼저 모셔와 시작했지만 당시 함께 활동한 다른 남성 무용수들에 비해 관운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느낀다고 말한다.

“저는 춤 이외 것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물 흐르는 대로 살자’가 제 생활 신조였기 때문에 필요하면 저를 데려가겠거니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립무용단과 한예종 전통예술원에서도 먼저 연락 와서 서류제출과 인터뷰도 했었지만, 스스로 자리를 찾아 쫓아다니고 그러진 않았지요. 오로지 춤에만 인생을 걸고 살아왔고 무대 외 남 앞에 별로 나서지도 않았어요. 마음에 없는 소리나 비위 맞추는 말을 잘 하지도 못하고 작품 만드는 것 이외에는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채 명인에게 여러 차례 기회가 왔었다. 그가 서울예술단에서 3년째 근무 중, 임기가 1년이 남았을 때 서울시립무용단에서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당시 소속된 서울예술단과 서울시립무용단 사이에서 저울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1년 임기를 남기고 나오게 됐다고 한다. 결국 서울시립무용단에는 심사를 맡으러 방문한 김백봉 선생이 최종적으로 단장 직을 맡게 되면서 채 명인은 또 다시 자리를 놓치게 됐다.

“2007년도에 김백봉 선생님께서 저에게 객원안무를 좀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정기공연 두 달 남겨두고 대작을 해야 하니 무리가 됐었는데, 작품 하고나서 선생님이 그만두시면 그 자리에 내가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했는데 거기에 임이조씨가 임명돼 들어가더군요. 그 무렵에 대전시립에서도 담당자들이 서울까지 올라와 대전으로 와달라고 했지만 제가 서울시립에 객원안무를 하는 도중이었고 당시 서울시립무용단 작품이 끝나면 임명되지 않을까 싶어 거절했는데 그렇게 놓치고 말았지요. 또 부산 시립에서도 요청이 왔는데 당시 이매방 선생님이 당신 옆에 저를 두고 싶으셔서 가지 말라 하셔서 거기도 못 갔습니다.”

▲ 한국전통춤협회 창립공연 후, 2013 국립국악원

채 명인은 먼저 나서서 자리를 맡기보다 다가오는 기회를 잡고자 했지만 번번이 시기가 틀어졌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오직 춤 하나만을 삶의 기준 삼아 살아온 그는 대나무와 닮았다. 그 스스로도 대나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고모 댁 대청마루 뒤가 전부 산인데 그게 대나무 숲이었어요. 그 숲을 보면 겨울에 눈이 쌓여있어도 파란 잎을 유지하고, 댓잎을 잘라 동치미를 담을 때 그 위에 올려놓기도 하며, 뿌리도 먹고 대나무를 잘라 그것을 가지고 밥을 만들고 하는 모습을 보니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대나무같이 겨울에도 푸르고 잎에서 부터 뿌리까지 버릴게 하나도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서 대나무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해외 뮤지션 바비 맥퍼린, 젊은 현대무용가 이용우와의 합동공연 새로운 시도

지난 2004년 2월 우리나라에서 ‘don’t worry, be happy’라는 곡으로 유명한 바비 맥퍼린의 첫 내한공연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전통 예술인들과의 협연 무대를 계획했고, 네티즌들에게 의견 타진 결과 해금하고 승무가 선택됐다. 그 무대에서 채 명인은 바비 맥퍼린과의 즉흥 공연을 펼쳤다.

 “제가 춤을 추면 동시에 바비 맥퍼린이 구음으로 음악을 해주는 무대였습니다. 당시 주최 측에서 완전한 즉흥 공연을 위해 무대에 나가기 5분전까지도 바비 맥퍼린을 못 만나게 했어요. 그분이 소리를 내주는데 4옥타브를 오르내리는 고음과 저음의 구사가 마치 목탁소리나 묘하게 청승맞은 소리를 내는 듯 느껴졌어요. 서양 것인데도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고 그에 맞춰 제가 춤을 춰 관객들에게 기립박수도 받았어요. 어떻게 서양의 음악인과 한국의 춤추는 제가 한 무대에서 만나 이렇게나 교감 할 수 있는가 싶었지요.” 바비 맥퍼린의 소리에 따라 그동안 쭉 춰오던 춤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며 예술이라는 것이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교감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음을 느꼈다고 채 명인은 말한다.

▲ 누가 아름다운 학의 눈물을 보았는가

“그리고 제가 이용우와 작업 한 것은, 2001년도에 내 승무를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 똑같은 춤만 보게 하는 것 같아 변화를 주기 위해서였어요. 그 친구 졸업 작품을 보면서, 한국춤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느꼈고 그를 불러 '내 공연 때 나는 무대 밑에서 승무를 출 테니 너는 무대 위에서 이 승무 음악에 네 나름대로 감성을 가지고 작품을 한 번 만들어보자'며 각자 한 무대에서 춘겁니다.”

채 명인은 이러한 새로운 무대를 이루기까지 그의 이전 창작 작품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86년도 반젤리스 음악을 사용해 당시 한국춤과 현대 음악을 접목한 첫 번째 시도인 '공수래 공수거', 서양 음악 하시는 최동성 교수님께 작곡을 의뢰해 구성한 '비로자나불에 관한 명상, 합', 대중가요 ‘님’을 국악형태로 편곡해 만든 공연 등 다양한 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평론가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이려 한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는 앞으로 새로운 창작 작업을 하기보다 그동안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춤꾼으로 남고 싶다고 한다. 전통춤의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어디든 공연 요청이 오면 추고 싶다는 그는 우리 전통춤이 진부하다는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지금 전통인 것이 당시에는 현재였을 것이고 지금의 현재는 미래에 과거가 될 것이니 한국춤의 발전을 위해 현재와 과거의 어떤 경계선도 갖지 않으려 했던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긴다.

“제자들이 해줬으면 하는 제 작품은 '누가 아름다운 학의 눈물을 보았는가'입니다. 이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한 어느 예인의 삶을 춤으로 형상화 한 작품으로 어떻게 보면 내 스승이야기기도 하면서 내 이야기 일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제자들하고 작업하면서도 제자들에게 '혹시라도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추모공연을 한다면 이 작품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공연을 해다오' 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 춤의 소중함을 알고 한국적 정서가 흐르도록 춤을 추라고 가르칩니다. 서양 흉내를 내더라도 너무 직선적으로 하지 말고 곡선미로 개조하라고 강조하지요. 우리 생활 자체가 다 곡선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