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유산 민경갑 화백(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화선지·먹 없이는 동양화 정체성도 없다”
[인터뷰 - 유산 민경갑 화백(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화선지·먹 없이는 동양화 정체성도 없다”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5.01.09 02:4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백년 끊임없는 변화 속 끝없는 창작의지… 다음 변화 모색 중

“예술가처럼 괴로운 자리도 없소.”
여든을 넘긴 원로화가는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절감한다고 한다.
“10년, 20년 전, 아무리 좋은 작품 그렸다고 해도 지금 안 그리고 있으면 작가라고 할 수 없죠. 그건 전직 작가라고 해야 합니다.”

겉에서만 보면 화려하고 멋진 직업일지 모르나 그 내면은 늘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으로 너무도, 너무도 힘들단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까지 창작해야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 한 점 아무리 잘 그려도 그 한 점 가지고는 먹고 살 수 없는 게 예술가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끝없이 창작해야만 화가, 화공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그는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 원광대 미술대학 교수, 미술은행 운영위원회 위원장, 단원미술제조직위원회 운영위원장 등 역임 / 1957 서울대 미술대학 졸업 / 1969 쌍파울로 비엔날레 초대, 1977 뉴욕 한국센터 초대개인전, 2002 파리 유네스코 초대개인전, 2012 서울시립미술관 초대개인전 외 다수 / 1996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2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2007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등 수상

요즘도 매일 6시간 이상 작업하는 등 꾸준한 작업량과 열정은 젊은 작가의 그것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지난 2008년 간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양띠 해인 새해를 맞아 얼마 전, 양羊 그림을 내놓기도 했다. 하도 작품이 팔리지 않아 ‘팔릴 만한’ 그림 한 번 그려본 거라며 웃는 민 화백이다. 실제로 최근 한 점 팔았단다.

인터뷰 처음부터 웃음이 오간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꾸중(?)부터 듣고 시작된 자리였으나, 끝으로 갈수록 기자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민 화백 같은 어르신이 쓴 소리를 내주셔야 국내 미술계와 작가 및 대중 인식에 변화와 발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신정이 막 지나 연희동에 위치한 민 화백 자택을 찾았다. 기자를 보고 민 화백은 대뜸 할 말이 없으니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냐고 했다. 당혹스러움에 연유를 여쭈니, 연예인 소식은 커다랗게 보도하면서도 예술가가 죽으면 누구 하나 신경 쓰는 기자가 있냐며, 요즘 기자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고 일갈했다. 기자가 변명도 하기 전에 이어서 그는 정부, 대중, 화단 등이 연계된 총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문체부에서 청년작가 실업문제에 대해서 통계를 내놨던데,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술대학에 가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려고 가는 것이지 어디 취직하려고 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부터 예술대학 취업률이란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인데… 평생해도 될까 말까 하는 게 예술입니다. 이제야 시작한 새파란 아이들을 청년작가라고 부르며 청년실업을 논하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죠. 정부부터도 이러고 있는데 문제점을 꼽자니 숨이 턱 막히는 게…”

▲ 양14-C 羊 The seep 46X53cm 화선지 먹 채색 2014년작

끊지 않고 반문 없이 공감하는 기자의 얼굴을 읽었던 건지, 민 화백은 오늘날 동양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창작에 대한 고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궁금한 게 있다면 다시 찾아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오늘날 동양화는 존폐 위기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요즘에는 동양화를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나 젊은 작가들을 찾기가 어렵다. 서양화와 비교해 작품가는 터무니없이 낮다.
“동양화가 50만원이면 서양화는 50억을 호가한다. 작가들 사이에서 우월감 혹은 위화감만 조성돼 간다. 이렇게 가격이 형성된 이유는 이러한 문제적 상황을 지적하고 말하는 평론가나 기자가 없기 때문이다. 점과의 간격이 넓어야 삼각형이 커지는 법인데, 제대로 된 평론가도 없고 화랑들도 죄다… 1950-60년대만 해도 이경성, 김병기, 김영주 등을 통해 평론의 장다운 장이 이뤄지고, 미술비평도 하고 그럴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작가들도 거의 없거니와 지면을 할애해주는 매체도 거의 없다. 학교에서는 동양화 전공학생들이 거의 없고, 현대미술관, 시립미술관이라는 곳에서는 ‘컨템포러리’만 부르짖고 있는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나 싶다. 이러한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고 걱정이 태산이라 내가 8년 전, 암에 걸렸다.”

-동양화 작가들 스스로도 대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 되는 것만 쫓아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책적으로도 그렇고 작가들 스스로의 문화마인드 또한 그 안에 갇혀있더라. 나부터가 내 자식이 훌륭하다고 해야 나가서도 자식이 대접받을 수 있다. 또한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대접하겠는가.”

-미술을 즐기고 소비해야할 대중들부터도 정체돼 있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대중들의 문화인식이 낮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돌 하나 덩그러니 놔두고 그걸 작품이라고 하는 작가나, 그걸 치켜세우는 사람들이나… 아름다운 여자가 지나간다고 해보자.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설레고 황홀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 잔상(殘像) 14-23An afterimage 112X162cm 화선지 먹 채색 2014년작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문명이 인간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동창회 나갔는데 오랜만에 얼굴 보는 자리에 다들 하는 일이라는 게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더이다. 8년 전쯤인가, 청년 몇몇이 담배를 피우곤 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더군요. 내가 가서 그거 주워야하지 않겠냐고 하니 마지못해 줍던데, 요즘에 내가 그랬다가는 아마 때릴 기세로 나올 겁니다. 이게 다 대화가 단절 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기저의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일까.
“웬만한 대부분의 그림은 그냥 그림이다. 예술이란 어느 정점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가 꼭 지켜야할 것이 있다. 첫째로는 자기 작품에 아첨하면 안 된다. 둘째, 자기가 자기 작품을 모방하면 안 될 것이며, 셋째는 안주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 것, 넷째는 예술의 속성, 정체성은 지켜야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끊임없는 창작.”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스며들고 또 다시 나옴을 보여주며 정신과 기운을 드러낸다. 반면, 서양화는 체증뿐이다. 우리 것은 인본주의와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기氣란 생명이고 혼이다. 동양에서의 예술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이 곧 인간을 뜻한다. 예를 들어, 비디오 아트나 홀로그래피 아트는 에너지가 빠지면 그저 시체에 불과하지 않는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전기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다.”

▲ 잔상(殘像) 14-25A An afterimage 112X162cm 화선지 먹 채색 2014년작

-재료가 상관있는 게 아니라 정신이 깃들어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작가들도 있다.
“오늘날 와서 무슨 동서양을 구분하느냐며 그럴싸한 말을 하는 작가들이 있지만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것 같을지라도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으로 구분되듯이 엄연히 다르고 각각의 정체성이 있다. 중심적 개념 즉 정체성만은 끝까지 가져가야할 것이다. 묵은 검다. 하지만 모든 색이 합쳐진 게 또 바로 묵색이다. 그 안에 모든 색이 들어있다는 거다. 우리 눈에 안 보이고, 우리 귀에 안 들린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예컨대 아메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없는 건 아니지 않나. 즉, 동양사상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동양사상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고, 그건 아크릴이나 캔버스에서는 그 맛이 안 난다. 한국인이지만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외국말만 한다면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과 같다. 동양화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고, 그게 먹과 화선지이다.”

-최근작 ‘진여’ 시리즈를 보면, 동양화이지만 기하학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자연을 찾아 전국을 돌던 때, 우연히 발길이 닿은 성황당에서 복을 빌며 걸어놓은 천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동양화가 실은 기하학적인 게 아니지만 그리다보니 직선적으로 표현이 되더라. 그래서 이제는 다음 변화로 넘어가고 있다.”

-실험적인 시도부터 자연과의 조화 및 공존, 진여 등 수차례의 변화를 거듭해 오셨는데 다음 변화가 궁금하다.
“앞서 ‘1기 : 파괴와 도전’, ‘2기 : 자연과의 조화’, ‘3기 : 자연과의 공존’, ‘4기 : 자연 속으로’, ‘5기 : 무위’, ‘6기 : 진여’ 등을 이어왔다. 이제 내 머리 속에 남는 게 ‘잔상’이더라. 말하자면 7기는 ‘잔상’이 될 것이다. 이는 내가 지금껏 왔던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문득 궁금해지는데, 기술자나 조수를 두는 작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작품이라기보다는 작업work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작업과 예술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작업 방법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예술과는 엄연히 구별돼야 할 것이다.”

-호 ‘유산’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닭 유酉를 쓴다. 내가 닭띠이기도 하고, 계룡산 태생이라(계룡산은 닭과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편집자 주) 닭 유를 썼다. 또한 이 한자를 보면 서녁 서西에 줄이 그어져 있는데, 이는 내가 예술로서 서쪽(서양)까지 가보자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지금도 매일 작업하고 계신 것으로 안다. 하루 작업량이 궁금하다.
“매일 6시간은 한다. 요즘 정초라 바쁘긴 하지만 건너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난 전시를 꼽아본다면.
“다시 말하지만 예술과 창작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고로 그런 전시는 있을 수 없다.”

-올해 우리 화단이 가져가야할 숙제는 무엇일까?
“동양화 선배로서 민망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다들 실의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럴 때 일수록 예술의 역할과 예술이 정말로 왜 필요한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해해야 한다.”

-어떠한 인물로 기억되길 원하시는지?
“나는 죽을 때까지 창작을 하고 싶고 그저 평생 예술가란 이름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이로, 또 동시에 예술가이자 생활인으로서의 그 경계를 넘나들며 고민이 많았던 이로 기억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