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환상과 현실의 교직 -호두까기 인형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환상과 현실의 교직 -호두까기 인형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5.02.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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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시인이자 화가, 그리고 무용평론가였던 고 김영태선생님은 1980년대 중반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공연을 보고나서 “김순정의 엘레바시옹(도약,시각적으로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이 보이게하는)은 허전할 만큼 아름답다”라고 책에 썼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이지 앞에 허전하다는 수식어는 왜 붙였을까 의문이었다.

한ㆍ러수교가 이루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만학도로 러시아로 4년간 유학을 갔다. 발레 교수법 수업시간에, 볼쇼이발레단 주역이었고 현재 발레마스터양성과정의 교수인 세흐와 뚜치니나는 나의 엘레바시옹이 정확하다고 외국인 학생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라고 하여 나이도 잊고 연습실을 가로질러 뛰어 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는 러시아(당시에는 소련)의 눈부시도록 완벽한 무용가들을 닮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해 불만스런 시기를 보냈다. 그들의 엄밀한 단련, 아우라, 몸의 비율, 예의범절, 눈빛 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환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춤추고는 다시 나와 현실에 적응해야하는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남자 연예인이나 멋진 선생들을 마음에 품고 있을 때 내 마음 속엔 리에파, 바실리에프, 누례예프, 울라노바, 플리세츠카야, 스투루치코바 등의 춤추는 모습, 걸음걸이, 미소, 가벼움이 떠 다녔다. 특히 러시아 무용수들의 엘레바시옹은 광활한 대자연을 표현하듯 뭔가 풍부한 느낌의 다른 것이 있었고 어린 나를 오래도록 사로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그렇게 나의 이상은 러시아 발레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장 흔히 상연되는 발레 레파토리는 1892년 12월 6일 러시아 쌍트 뻬쩨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랑받아 온 호두까기 인형이다. 나 역시 국립발레단원일 때 가장 많이 춤 춘 작품이기도 하다. 작년 겨울부터 올 초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모처럼 예술적 분위기를 흠뻑 느끼고 있었던 중 운 좋게 발레공연도 볼 수 있었다.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총 29회의 호두까기 인형을 볼쇼이극장에서 하는데도 표구하기가 어려웠다. 한국도 표구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일단 공연 횟수가 너무 적다. 레파토리시스템(한 시즌마다 몇 개의 레파토리가 상설로 계속 상연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러시아의 발레와 오페라 전용극장들은 늘 표를 사러 오가는 시민들로 붐빈다. 하루씩 걸러 발레와 오페라가 끊임없이 공연되는 환경은 부러움을 넘어 찬탄을 하게 만든다.

호두까기인형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꼽으라면 현실의 클라라가 환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다. 1985년에는 TV문학관 '광장(최인훈 원작, 김홍종 연출)'에서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내가 춤추는 이 장면이 여주인공 조용원의 대역으로 삽입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기억은 2014년 성탄절에 방영된 발레소재 TV영화인 “발레리노”의 예술감독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막에서 생쥐왕을 물리친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로 변모하고 어린 클라라가 어른이 되어 왕자와 함께 눈의 나라를 여행하기 직전의 이 장면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도 이 부분에서 클라라의 터질 듯한 기쁨과 그 이면의 두려움을 잘 그려내고 있다. 러시아 정교의 성탄절인 1월7일 밤늦게 TV에서 본 흑백의 1978년 볼쇼이발레단 공연실황에서 바실리예프와 함께 춤 춘 막시모바의 클라라역은 그래서 더욱 더 눈부셨다.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현실에서의 어린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이 부서진 것을 보고 울고만 있었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의 클라라는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신고있던 슬리퍼를 벗어 생쥐왕에게 힘껏 던져 단번에 명중시킨다. 그 때를 틈타 쓰러져있던 왕자는 기운을 차려 생쥐왕을 물리친다.

곧이어 왕자와의 행복한 여행이 차디 찬 겨울 나라부터 시작된다. 왜 왕자와 함께 곧바로 따뜻하고 달콤한 과자의 나라로 가지 않았을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설원에서 눈송이 요정들과 함께 수없는 엘레바시옹을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화사한 봄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연말연시용 호두까기 인형을 그래서 단순한 어린이용 볼거리 위주의 발레로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원작자 호프만의 생애만 보더라도 그의 삶이 어찌나 드라마틱한지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이다. 한 해의 절반인 6개월의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러시아의 자연환경 속에서 긴 인내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70세가 된 프랑스인 안무가 프티파가 병이 나자 51세의 제2발레마스터였으며 러시아인인 이바노프에게 드디어 처음으로 안무기회가 찾아왔고 눈의 나라가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마치 아직도 봄이 오려면 멀었지만 봄을 맞이하는 의식, 마슬레니짜가 얼음과 눈 위에서 늘 흥겹고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추운 이 시기가 지나가면 머지않아 꽃들이 빙빙 돌며 왈츠를 추는 화려한 봄이 올 것을 알기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발레가 상연되는 극장으로 간다.  현실과 환상을 교직하며 날아오르는 클라라를 보며 각자의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하여.

* 앞으로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이자 현재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전히 현역으로 열정적으로 무대를 이끄는 김순정 교수의 발레와 무대 뒤의 이야기들을 담은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를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