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기행-126]암울함의 탈출과 극복 - 한국이민사박물관
[박물관기행-126]암울함의 탈출과 극복 - 한국이민사박물관
  • 이정진 Museum Traveler
  • 승인 2015.02.1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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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자 사설 中)

▲ 상설전시실 내부

선인장과 식물 에네켄Henequen을 뜻하는 애니깽은 110년 전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의 이민 1세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작은 희망에 몸을 싣고 떠난 이민자들이 마주한 열악하고 비인도적인 작업환경, 굴곡진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애니깽은 이민이란 이름아래 감춰졌던 이방인의 생을 대변하고 있다.

인천의 제물포는 1883년 개항되어 1903년 우리민족의 공식적 첫 이민이 이루어진 곳으로 이역만리 이민자들의 마지막 발걸음을 기록한 땅이기도 하다. 여전히 부두가 보이는 이곳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새로운 삶을 찾아 조국을 떠났던 근대 이민사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 상설전시실 내부

1903년, 각처에는 하와이 이민자들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붙여졌다. 하와이 정부로부터 사탕수수 농장의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방榜을 공포한 것이다. 일제치하 아래 불안정하였던 정세와 빈곤이라는 경제적 상황에서 이민은 새로운 땅에서의 새 출발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기 적절하였다. 제물포서 출발한 121명의 이민자 중 102명만이 갤릭호(S.S Gaelic)에 승선했다. 한편, 그들의 항해를 기록한 전시에서는 이민의 첫 걸음이었던 배 안에서의 고단함과 고통이 느껴진다. 

▲ 교포신문 및 서적

승선한 이들의 모습 앞으로 쌓인 짐들, 많은 것을 담지 못한 그 속에 담긴 백색의 저고리와 흑백 가족사진은 조국을 떠나는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었을까. 배 멀미와 질병에 시달리던 길고 긴 항해를 떠올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으며 점차 낯선 땅으로 다가가는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다. 사탕수수 농장 내 작은 통나무 집 안 한국음식으로 차려진 작은 밥상과 직접 채소를 기르고 장을 담그던 모습에서 고국을 향한 그리움과 애처로움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 이민자들의 사진 및 유물

첫 이민자들의 고된 농장에서의 삶은 미국 내 도시와 본토로의 진출로 이어지게 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민사를 쓰게 된 동기를 제공했다. 1952년 매캐런 월터 이민법이 통과됨과 동시에 광복 이후의 전쟁고아들이 미국가정으로 입양 되면서 타국에서의 한인사회는 조금씩 뿌리를 내리게 된다.

▲ 이민자들의 사진 및 유물

미국과 멕시코로부터 시작된 이민은 점차 쿠바,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의 새로운 제3국가로의 이주로 이어졌다. 제3국에서의 생활 속에서도 자국의 뿌리를 이어주었던 한인회 및 교포들이 남긴 유물들에는 그리운 얼굴과 한글로 채워진 하나의 발자취를 읽히게 한다. 일제강점기, 조국으로의 귀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애국심으로 이루어진 독립운동은 광복에 큰 힘이 되었다.

▲ 이민자의 가방 속 가족사진과 옷가지

당시 이민은 우리 국민의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 향하는 개척자의 도전과도 같았다. 낯선 땅에서의 적응과 잘 이겨낸 기반, 그 안에서도 잃지 않은 민족 정체성......, 지금도 긴 여정 중인 세계 속의 한국인과 함께 성장하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한국이민사박물관(mkeh.incheon.go.kr)
위치_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329(북성동) / 문의_032-440-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