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유령의 집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유령의 집
  • 윤진섭 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5.02.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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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형태심리학에 유명한 실험이 있다. 오리와 토끼의 ‘더블 이미지’가 그것이다. 오리에 주목하면 토끼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반대로 토끼에 집중하면 이번에는 오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실험은 인간이 두 개의 사물을 동시에 인지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비근한 사례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화단의 중진작가인 K씨가 쓴 흥미있는 글 한 편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70년대의 화단을 회고하며, 당시 이름이 꽤 알려진 몇몇 작가들이 작품의 제작 연대를 경쟁적으로 조작하더라며 개탄을 했다.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거명을 하지 않았지만, 화단에서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작가들은 왜 작품의 제작 연대를 조작하는 것일까? 우선 허영심을 들 수 있다. 일단 어떤 화풍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욕심이 생기면, 좀처럼 조작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망상에 빠져 있거나(믿기 힘든 일이지만 예술계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실제 유행하는 화풍에 근소한 햇수의 차이로 뒤져 있어 선구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설 경우, 끝 모를 조바심에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더욱 위험한 것은 ‘내가 누군데?’ 하는 영웅심이다. ‘국내 최초’, 더욱 심할 경우 ‘세계 최초’라는 영광스런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가 돼야 한다는 영웅심리가 범죄에 가까운 연도 조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대부분 그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에 작품에 본래 있던 연도를 지우고 새로운 연도를 써넣어 제작 연대를 앞당긴다. 가령, ‘1953’년 이면 ‘1947’년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 작가의 작품 경향을 연대기적으로 훑어보면, 그보다 앞선 시기에 그는 전혀 다른 화풍을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한 작가가 같은 시기에 전혀 상반된 두 화풍을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앞서 예를 든 ‘오리와 토끼’의 실험이 무색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정당화한다고는 하지만 실은 ‘정당화한다’고 스스로 믿는 것에 불과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알리바이를 위해 애꿎은 주변사람을 끌어들인다거나, 기록을 고치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없던 기록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일들은 모두 후에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 비하면 어떤 명확한 기록이나 근거도 없이 연대를 올리거나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측은 차라리 순진한 편에 속한다. 그러한 조작이나 주장은 일축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성코드에 감염된 사람들은 고대 희랍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가 쓴 ‘이디퍼스 왕(Oedipus Rex)’을 꼭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감추어진 진리(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한)를 찾기 위해 왕의 자리를 마다한 이디퍼스 왕은 끝내 자신을 둘러싼 추악한 소문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자, 두 눈을 후벼 파는 것으로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을 통탄하며, 스스로 자신을 처단하고 황야를 헤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의 비은폐성’은 이처럼 예술작품을 통해 세상을 향해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다.

모방과 표절, 아이디어의 도용과 같은, 창작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게 마련이다. 도둑이 도둑질한 자신을 알고 있듯이,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을 한 사람은 스스로를 ‘유령의 집’ 속에 유폐시킨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꿈속에서만은 자유롭지 못하다. 가끔씩은 악몽에서 깨어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헛것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자수해서 광명찾자!’란 표어는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60년대에 한동안 유행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자신을 속인 사람들은 진리 앞에 투명하게 나서기 바란다. 그 방법만이 사후에 노련한 전문가들로부터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처참한 운명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