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딱지
[연재]딱지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07.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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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3)

그렇지만 정구가 공연히 해보는 소리는 아니었다. 미국에는 정구의 누이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누이가 먼저 이민을 가고 어머니가 뒤따라 건너간 것이다. 어머니는 호적상으로는 아직도 수동씨의 부인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수동씨는 생홀아비인 셈이다. 어머니가 평소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도 순전히 수동씨 때문이다.

수동씨는 건어물상으로 큰돈을 벌었던 부친으로부터 거창한 재산을 물려받았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온갖 재미와 온갖 사업을 골고루 경험해보고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수동씨는 심지어 정치사업에도 손을 대 고향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까지 해보았다. 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난 것이 바로 그 무렵이다.

정구는 지금도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정구에게 이민을 권한다. 그러면서 수동씨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뛴다. 수동씨만은 절대사절이라는 것이다.

환갑이 넘은 노인네를 혼자 놔두고 이민 갈 자신 있어요?

미순이 물었다.

정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우리 고향에 내려가 살까?

고향 선산에는 산지기집이 한 채 딸려 있었다. 정구의 할아버지 때 지은 것인데 방이 세 개나 되고 기름보일러까지 설치돼 있는 번듯한 한옥이다. 미순이 또 눈을 흘겼다.

산지기 노인네는 그럼 어떻게 하구요?

사정 얘기를 하고 나가 달래야지. 자식들이 다들 잘살고 있으니까 상관없지 뭐.

그냥은 못 나가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하구요?

여기 보증금 빼서 주면 되잖아?

그 다음에는요? 그 집을 차지하고 무얼 해서 먹고살 건데요? 농사지을 땅 한 평도 없잖아요?

정구는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선산에는 원래 스무 마지기나 되는 논밭이 딸려 있었다. 산지기 노인네는 평생 그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가르치고 선산을 보살펴 왔다. 그러나 수동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다 팔아 없애는 바람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늙은 산지기 내외는 이제 우두커니 일손을 놓고 앉아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살고 있었다. 정구네가 보태주는 것이라고는 설날이나 추석 명절 때 쑥스럽게 내미는 5만 원 아니면 3만 원짜리 봉투가 고작이었다.

쫄딱 망해가지고 산지기집에 들어와 산다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거 한번 생각해 봐요.
미순이 오금을 박았다.

고향에는 그렇게 내려가는 게 아녜요. 금의환향은 못할망정 산지기를 내쫓고 그 집에 들어가 산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결국 방이 세 개나 되는 훌륭한 집이 있으면서도 그 집에 들어가 살 수는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그처럼 막바지에 몰려 숨이 넘어갈 것만 같던 어느 날 밤이었다. 여전히 허탕을 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미순이 신발장 위에 쌓아 둔 묵은 신문더미를 끌어 내렸다.

복덕방 사람이 그러는데 일산에 아주 싼 집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았대요.

일산이면 경기도잖아?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지금 경기도 강원도 따지게 됐어요?

두 사람은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신문을 뒤진 끝에 간신히 그 광고를 찾아냈다. 일산읍내에 있는 연립주택인데 단돈 3백만 원만 있으면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고였다.
미순은 당장 전화를 걸어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준일 작가/ TV드라마 '수사반장', '형사' 등, 장편소설 '예언의 날', '무지개는 무지개'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