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구의 음악칼럼]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 2
[정현구의 음악칼럼]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 2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코리아 네오 심포&
  • 승인 2015.03.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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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곡호대군악대, 이왕직양악대, 경성악대로 이어지는 악대는 분명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발전사에서 하나의 씨앗이 됨은 분명하다. 그러나 1930년경까지 가까스로 명명을 이어온 이 단체는 취주악대의 범주를 넘어서지는 못 했다. 관악과 현악이 조화를 이루는 오케스트라는 숭실전문 관현악부와 보성전문 현악대에서 그 발전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숭실전문은 1910년경부터 합창부와 밴드부가 조직되어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활동했고, 선교사들에 의해 현악도 발전을 이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아마추어 관현악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혹자에 따라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로서 3.1운동 이전에 조직되었던 숭실전문의 이 관현악단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 실내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1926년 선교사였던 부츠 부인이 주도하여 YMCA 안에 만든 중앙악우회(또는 경성중앙관현악단)를 최초의 오케스트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악단 역시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 악단이 본격적인 관현악합주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홍난파, 안병초 등에 의해 조직된 연악회 연주가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이따금 열렸고, 1928년 보성전문의 현악대, 경성제대에서도 관현악단이 조직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그런가하면 평양에서는 평양관현악단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연희전문에서는 1930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현제명이 김영환의 뒤를 이어 음악과장에 취임하여 합창부와 관현악부를 조직하여 평양의 숭실전문 음악부와 경쟁을 하며 전국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화여전에서도 1925년 음악과가 정식으로 창설된 후 음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주로 합창음악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연희전문 오케스트라는 방과 후에 거의 매일 연습을 했고, 봄가을로 지방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었다. 곽정순, 김생려, 정희석, 김성태, 이인범, 황재경, 문학준 등이 여기에서 활동했던 음악인이다.

이런 가운데 1934년 진보된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는 경성관현악단이 이종태를 지휘자로 하여 발족되었으며, 2년 후에는 홍난파를 주축으로 하여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창설되었다. 이 경성방송관현악단은 처음 계약단원 12명으로 출발하였으나 곧 20명으로 증원되었다. 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오케스트라가 탄생된 것이다. 또한 이 오케스트라는 방송으로 통해 연주를 들려준 최초의 단체이기도 하다. 혹자에 따라서는 이 경성방송관현악단을 KBS교향악단의  전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홍난파의 타계 후 경성방송관현악단은 계정식을 지휘자로 맞는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일본인을 지휘자로 초빙하기를 요구하고, 이에 반발한 한국인들이 이 악단을 그만두고 나와서 독립된 악단을 조직한다. 이것이 1943년 탄생한 경성후생실내악단이다. 훗날 교향악단으로의 발전을 목표로 창설된 이 실내악단은 제1바이올린에 김생려, 제2바이올린에 이용철, 비올라에 박평수, 첼로에 김태연, 콘트라베이스에 이유성, 피아노 이인형, 소프라노 김천애, 테너 이인범, 작곡 김성태로 출발하였다.

1944년 한때 만주의 신경오케스트라에 합류하기도 했던 이들은 해방 후 경성방송관현악단의 주자들을 규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려교향악단을 1945년 9월 15일 창설한다. 현제명을 중심으로 한 고려교향악단은 계정식이 첫 지휘봉을 잡아 지휘를 맡았고,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임원식이 그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