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의 춤세계
[특별기고]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의 춤세계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3.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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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우리나라 최고령의 전통무용가 운학 이동안 옹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친 이재학(李在學; 1874-1946)선생께서 화성(華城) 재인청(才仁廳) 출신으로, 특히 ‘기악’(해금)에 조예가 깊었다 하니 그는 세습적인 예인의 후예로서 어려서부터 전통예능을 익혀 온 셈이다.

실상 그의 선친은 아들이 자기의 대를 이어 ‘재인’이 되는 것 을 원치 않았으나 열세 살에 ‘남사당패’를 쫓아 가출하는 등 방황을 하자, 열네 살이 되던 해 놀이판에서 강제로 데려와 어쩔 수 없이 뒷받침을 해주며 본격적인 수련을 받게 한다. 이 때 소년 이동안이 만나 모셔온 선생이 ‘줄타기’의 김관보(金官甫)이다.

한편 선친 이재학은 어린 이동안에게 도대방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동안은 약 1년간 도대방을 지내다 1922년, 일인들이 강제로 화성 재인청을 폐지하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도대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 이동안은 재인청 자리 화령전(華寧殿, 수원시 신풍동 소재, 史跡 115호)의 풍화당(風化堂)을 근거지로 계속 학습을 쌓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선친의 가문의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이동안에게 장가를 들게 하자,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서울로 도망쳐 광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가 1923년, 열일곱 살 되던 해이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보유자

바로 이 광무대에서 ‘이동안’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재인청 출신 선배들이었던 당대의 명인들로부터 높은 수준의 전통예능을 두루두루 학습 받게 된 것이다. ‘춤과 장단 김인호(金仁浩), ‘발탈’의 박춘재(朴春才), 그리고 해금, 대금, 가야금, 태평소, 잡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고의 선생들로부터 두루 섭렵을 하였다.

이러한 시절이 얼마간 지나고 ‘줄광대’, ‘춤꾼’, ‘잽이’(악사) 등 다양한 기예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자, 당시 전통예능계의 지도자로 명창들의 고수이기도 했던 한성준(韓成俊; 1874- 1941)이 주관한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초빙되어 춤과 춤장단을 가르친다.

이 연구소는 전통음악,무용의 전수 뿐만이 아니라 창작에까지 손댔던 곳으로, 여기에서 이른바 우리나라 ‘신무용계’의 개척자 최승희(省承喜; 1911)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재인청 계열’의 ‘장고무’, ‘태평무’, ‘진쇠무’, ‘입춤’ 등을 전수하게 된다.

▲ 광무대에서 공연한 '발탈'을 연상하며

1930년대 이후 그는 순업(巡業)이라 해서 구 극단(舊劇團)과 때로는 신파(新派) 유랑극단 등과 팔도는 물론이요, 멀리 중국 만주까지 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줄타기’, ‘춤’, ‘발탈’과 또한 ‘춤장단’의 잽이로서 인정을 받아왔다.

한 때는 ‘수원’, ‘인천’ 등지의 권번(卷番:기생학교)의 선생도 했고,1941년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황군위문대’(皇軍慰問隊)라는 것을 만들어 우리의 전통예술 인들을 강제로 동원했을 때에는, 여기에 본의 아니게 가담하게 되어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주로 만주 등을 무대로 순회공연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무용학원을 하기도 하고 국극단(國劇團), 여성농악단(女性農樂團) 국악예술단(國樂藝術團) 등을 운영하기도 하고, 또는 개인적으로 참여하면서 1970년까지는 춤과 함께 ‘줄타기’를 이어왔다. 그 후로는 주로 ‘춤’과 ‘발탈’에 치중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1983년 그가 보유하고 있는 예능 가운데, 오히려 작은 한 분야인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면서 그는 발탈의 예능보유자(藝能保有者)가 되었는 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활동 무대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 사진 찍기를 수락한 이동안 옹

그가 보유하고 있는 예능 가운데 작은 한 분야인 ‘발탈’의 보유자로 못 박아지면서, 소중한 ‘재인청 계열’의 ‘춤’을 비롯한 다양한 ‘기예’들이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엉뚱하게 잘못 인식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의 춤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무릎 제자로 거쳐 간 인사들은 이제 우리 춤판의 큰 기둥으로 엄존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김백봉(金白峰), 장월중선(張月中仙), 최현(崔賢), 김덕명(金德明), 문일지(文一技), 정혜(裵貞惠), 정승희(鄭承姬), 김백초(金白初), 최경애(崔京愛), 김진홍(金眞弘), 오은희(吳銀姬), 김명수(金明洙) 정경파(鄭敬波) 등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이동안 전통무용연구소’의 조교를 맡으면서 ‘재인청 계열’의 모든 것을 이어받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승희(李昇姬)가 있다. ‘발탈’의 제자로는 박정임(朴貞任), 조영숙(曹英淑-명창 曹夢實의 따님), 최병기(崔炳基), 송영탁(宋英卓)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현재 ‘이동안’ 옹이 기억하고 있는 ‘재인청 계열’ 전통무용의 이름을 적어 본다. 기본무, 살풀이, 승무, 태평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성진무, 화랑무, 도살풀이, 검무, 남방무, 선인무, 팔박무, 진쇠무, 승전무, 장고무, 노장무, 소고무, 희극무, 아전무, 바라무, 나비춤, 장검무, 신보심불로, 입춤, 신선무, 오봉산무, 학무, 하인무, 춘앵무, 화선무, 포구락무, 연화대무….

위의 춤들은 ‘정재(呈才)’를 비롯하여 ‘무속춤(巫俗舞)’, ‘작법(作法-불교 의식 무용)’, ‘한량(閑良)’, ’기방춤(妓房舞)’ 그리고 민중 취향의 ‘민속무용’까지 총괄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