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칼럼]국립발레단, 가장 아름다운 ‘지젤’
[이근수의 무용칼럼]국립발레단, 가장 아름다운 ‘지젤’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5.04.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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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첩첩이 산들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 축제가 열린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 지젤을 연모하는 마을 청년 힐라리온이 꽃송이를 들고 집근처를 기웃거리지만 지젤의 관심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로이스란 가명으로 귀족신분을 숨기고 지젤에게 접근해온 알브레히트 백작이다. 그는 공작의 딸 바틸드와 약혼한 사이다. 동화적인 사랑이 시작되지만 진실하지 못한 만남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실연으로 상심한 처녀 지젤의 죽음으로 동화는 끝을 맺는것이 1막의 스토리다. 2막은 순수한 사랑을 배신한 남성들에 대한 윌리(Wilis)의 복수극이다. 윌리는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결혼식 전날 죽음을 맞이한 원혼 들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아름답게 치장한 그들은 여왕인 마르타의 지시아래 남성들을 묘지로 유인하여 밤새도록 춤추게 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다. 힐라리온이 첫 번 째 희생자고 지젤의 무덤을 찾아 온 알브레히트도 그들에게 점 찍힌 희생물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사랑에 눈뜬 알브레히트와 그를 용서하고 지켜주려는 지젤의 순애보가 신비스럽게 펼쳐진다.

국립발레단장 취임 1주년을 맞는 강수진이 2015년 시즌 개막작으로 <지젤Giselle>(3.25~29, 오페라극장)을 선택했다. <라 실피드 La Sylphide>와 함께 전형적인 낭만발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841년 장 코랄리와 쥘 페로가 아돌프 아당의 음악을 사용하여 공동 안무한 원작을 지젤 초연 150년을 맞는 해인 1991년 파트리스 바르가 재 안무했다. 김지영, 이은원, 박슬기가 타이틀 롤을 맡아 각각 김현웅, 이동훈, 김영철과 짝을 이루었다.

나는 개막 첫날 김지영? 김현웅 캐스팅공연을 보았다. 각각 50분씩 전 2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특징은 1막과 2막의 완벽한 대조성이다. 1막이 위선적 사랑이라면 2막은 진정한 사랑이고 1막이 배신이라면 2막은 용서다. 또한 1막이 현실이라면 2막은 꿈꾸는 세상이고 1막이 남성중심이라면 2막은 여성이 지배한다. 이러한 구조상의 특징은 명(明)과 암(暗)으로 대비되는 조명의 차이, 리얼리티와 로맨티시즘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텍스트 구성, 그리고 소설적 서술과 시적분위기로 차별화된 드라마트루기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대비 속에서 가장 큰 숙제는 1막과 2막을 동시에 춤춰야하는 지젤의 능력이다.

1막의 순진무구한 산골 처녀가 2막에서는 중력을 이기고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영적인 존재로서 변신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문훈숙이 가장 지젤다운 발레리나라고 일컬어진 것이나 울라노바(Galina Ulanova), 마르코바(Ilicia Markova), 마카로바(Natalia Makarova) 등이 20세기의 전설적인 지젤로서 기억되는 것은 지젤 춤의 미묘한 복합성 때문일 것이다.

김지영의 지젤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1막에서 지젤의 역할은 평범했다. 알브레히트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의 밀고 당김은 순수하고 귀여웠으나 두 남자 사이에서 겪어야할 고뇌가 보이지 않고 알브레히트의 정체가 드러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느꼈을 절망감과 광기도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약간은 허무하게 느껴진 1막의 결말에 비해 2막의 김지영은 지금까지 보아온 중 가장 완벽한 지젤의 춤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몸은 공기처럼 가볍게 공간을 이동하고 그 가벼움 속에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마르타에 맞서는 에너지를 품고 있어 실재가 아닌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김지영의 연륜에 새롭게 개화한 감성이 결합된 지젤의 탄생이었다.

마르타(신혜진)의 춤에는 여왕의 카리스마가 돋보였고 어둠 속에서 순백의 로맨틱 튀튀로 성장한 매혹적인 24명의 아라베스크는 <라 바야데르>에서 망령들의 군무를 연상시키며 무대를 신비롭게 장식했다. 윌리 들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군무가 원작의 분위기를 살려준 것에 비한다면 1막의 군무는 산만했고 알브레히트(김현웅)와 힐라리온(정영재)의 춤은 존재감이 약했다.

파트리스 바르는 지젤을 재 안무하면서 지젤과 바틸드를 이복자매관계로 설정하고 그 뒤에 얽혀있는 부모들 간의 로맨스를 추가했지만 이러한 관계들이 무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마을을 둘러싼 먼 산들의 흐릿한 윤곽과 두 채의 시골집만으로 단순화된 무대장치 역시 싱거운 느낌이었다. 감동적이었던 2막의 전개와 비견될 수 있도록 1막의 재구성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