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1
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1
  • 이은주 갤러리 정미소 디렉터
  • 승인 2015.04.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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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안공간의 전개

이은주 갤러리 정미소 디렉터
한국의 대안공간은 해외 사례의 영향을 받아 태동했지만, 한국 실정에 맞게 변화, 확장, 진화해왔다.

1998~1999년 즈음 태동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 한국의 대안공간은 1세대, 2세대를 거쳐 이제 막 또 다른 출발을 예견하는 3세대로 접어든 것으로 나누기도 한다.

통상 전시내용의 패러다임이나 역할에 대한 기능적 콘텐츠를 적용해 구분하기 보다는 생겨난 시기와 생겨난 시점 이후 다양한 활동을 통한 진입 성공기점을 기준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가령, 맨 처음 시작한 공간에 대한 그 출발 자체를 인정하기 위한 척도이며, 1세대와 2세대를 구분할 때 출발연도를 기준으로 5년을 넘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초창기 대안공간을 우리는 이렇게 정의해왔다. 소위 제도권 미술관과 철저히 판매 위주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품지 못하는 작가와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의 장(場)으로 말이다.

이처럼 작가 개인의 주체적인 세계를 권력 구조화된 제도권과 상업적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표출할 수 있는 장의 시작을 대안공간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작업 내용과 방향성이 명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몇 가지 사소한 장치로도 작가성을 인정받게 되는 틀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대안공간은 작가 주체의 개인성과 정체성에 대한 모색을 심화시킬 수 있는 표현의 장으로 인식되었다.이러한 모토로 대안공간이 전개되면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에 주체적 시각을 가진 작가군이 대거 배출됐으며, 실제로 현재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일군의 유명 작가를 특정 대안공간 출신 작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2000년대 초?중반을 넘어서 대안공간은 미술계 시스템에 부합하는 작가군을 배출하는 생산소 역할에 충실했다. 특히 시간이 흐르면서 주체적 작업 방향이 정해진 작가라면 비엔날레와 더불어 아트페어 등의 미술시장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따라서 상업과 비상업의 트랙을 오가는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며 존재했다.

이들은 신진작가 등용문을 나선 이후 작업 방향과 삶의 지표에 상응하게 때에 따라 미술관, 갤러리, 대안공간 등의 전시장을 전방위적으로 선택한다.대안공간이 감당하는 모든 역할과 환경은 작가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예술가가 성장해 나가는 시기와 동일하게 대안공간의 역할이 점차적으로 변화를 겪거나 본래의 기능이 상실되기 마련이다. 특정 작가군 집단에 의해 성장한 대안공간의 경우 작가의 성장속도와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개별 예술가가 ‘성공’의 기준 틀을 상정할 경우 분명 대안공간의 움직임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공재원의 지원이 시작된 이래로는 대안공간 초기 본래의 기능을 회복해야 했다. 즉 비제도권 작가들이 점차적으로 제도권으로 흡수되면서 대안공간은 또 다른 대안을 촉발시켜야 했다. 대안의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 모순에 직면한 것이다.

이때부터 대안공간의 존립을 위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도 인식했을 것이다. 정책 집행 연도에 맞게 1세대, 2세대를 구분하고 대안공간만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심각성을 깨닫고 제도권에 또다시 흡수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고루한 대안을 세우기도 했다.

즉,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작업을 전시하지 않거나, 대안공간은 미술관에서 소장하지 않거나 혹은 상업갤러리에서 팔지 않는 작품을 다룬다는(전시하거나 판매한다는 점) 지점에서 미술관과 미술시장의 척도에서 비켜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밀도와 생계를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작가군의 수명이 짧아졌으며, 대안공간과 비엔날레 작가군과 아트페어와 미술시장 작가군으로 급속도로 갈리게 되었다.

사회 전반, 좁게는 미술을 포함한 문화예술 전반적인 시스템에서 반쪽 제도의 보호를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이 결과 예술성은 좋지만 생계가 어렵고, 잘 팔리지만 예술성이 결여된 작업들이 속수무책으로 소비되었다.즉 2000년대 초?중반 이후 미술시장에는 자유롭지만, 자본에 자유롭지 못한 대안공간이 되었다. 

 

 *미술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윤진섭 교수는 비평의 위기를 논하면서 오늘날 비평과 기획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전시기획자에게는 비평적 시선이 반드시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 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 작가이기에 ‘크리큐라티스트(cricurartist)’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그는 결국은 기획자와 비평가의 경계는 '질'의 문제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오늘날 통섭과 융합을 논하는 시대에 이런 경계는 점점 허물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3년 여를 ‘큐레이터토크’를 연재해 오던 이은주 정미소 디렉터가 이번 호부터 현장의 비평을 가득 담은 ‘이은주의 '현장크리틱‘을 연재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