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그리운조성국 선생님
[특별기고] 그리운조성국 선생님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4.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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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동문선>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일봉(逸峰) 조성국(曹星國, 1919-1993)선생은 올곧은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60년대 초였으니 40년이 가깝습니다.‘

영산 쇠머리대기’와 ‘영산 줄다리기’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 문화재위원이며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이셨던 임석재(1903-1988) 선생을 모시고 영산 지방의 민속놀이며 굿을 채록하러 다니면서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곧이어 자상한 안내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꼼꼼하신 임 선생과 호탈하신 조 선생은 의외로 의기투합하셔서 힘든 줄 모르고 ‘쇠머리대기’며, ‘줄다리기’며, ‘문호장굿’ 등을 찾아 사진을 찍고, 녹음도 하고, 조사보고서도 만들어 뒤에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기초 자료들을 마련했었습니다.

자칭 타칭 농사꾼이요, 진보적 개혁운동가인 선생이 ‘영산 줄다리기’의 기능 보유자가 되면서 영산 민속의 큰 마당인 ‘3·1 민속문화제’가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민중 문화가 살아 숨쉬는 민족문화의 요람이 되었음도 그의 공적임을 우리 모두는 기리고 있습니다.

그가 떠난 영산 고을에서는 그가 뿌린 씨로 하여 오늘도 어김없이 ‘3·1 민속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련만 어딘가 텅 빈 한 구석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그의 무릎 제자인 김종곤 씨를 비롯하여 영산의 줄꾼들이 『화보로 보는 ‘영산줄’과 ‘대학줄’』이라는 이름의 전수 교재를 발간하기에 몇 말씀의 회고담과 축하의 뜻을 보냅니다.

조성국 선생은 줄다리기라는 공동체놀이를 통하여 평등과 민주의 세상을 개척하려 하셨으니, 이화여자대학을 비롯한 경향 각지의 대학에서 벌인 응집과 용솟음의 줄판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것은 민주화의 한 도정이었고 통일로 가는 지름길의 모색 이었습니다.

용케도 그 어려웠던 시절의 사진과 기록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또한 이 책이 중요 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 줄다리기의 전수 교재를 겸하는 것이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 조성국 선생님의 초상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닌 좋은 세상 만들어가기 위한 힘의 조화를 이 화보를 통하여 터득할 수 있겠기에 말씀입니다.

줄다리기란 우람한 두 개의 힘이 끌리고 당기는 가운데 더 큰 하나의 힘으로 승화하는 팽배의 순간을 통하여 고매한 경지의 성취감을 맛보는 놀이입니다.

그러기에 이 단순하다면 단순한 놀이를 하루 종일, 아니 며칠씩이나 뒤엉켜서 놀았던 것이지요.

한때 선생께서는 줄다리기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자기 한 사람이고 보니 집단놀이를 되살리는 데 오히려 부담이 된다면서 ‘인간문화재 사표 소동’을 일으킨 적도 있으셨습니다.

이 일이 주변의 만류로 무산되자 그러면 주어진 여건에서나마 할 일을 하셔야겠다면서 ‘한국인간문화재 연합회’라는 것을 사재를 털어가며 만드시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창립을 기념하여 ‘종합예술제’(1978년 3월 28-30일, 세종문화회관 별관)를 마련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남기셨습니다.누렇게 바랜 그의 취지문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에 선생의 육성, 다시 접하는 심정으로 전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한국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 취지문]
우리 조상의 얼과 멋의 모습을 재현하는 전통예술의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지정된 거의 모든 종목을 엮어 인간문화재와 전수자들이 정성껏 펼치는 자리입니다.

반백세기(半百世紀)를 살아오는 동안에 숱한 애환을 우리 조상들은 환희로 노래하고 슬픔도 한으로 읊으셨습니다. 짓밟히고 소외당하면서도 그 억울함을 해학과 풍자와 또 직설(直說)의 예술로 발산시키는 멋과 여유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산맥(山脈)과 강류(江流)의 아름다음을 악곡(樂曲)의 선율로 삼기도 하고 그릇이나 연모의 선(線)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한 부족, 한 지방의 단결에도 민속놀이라는 제전으로 멋과 신명의 자율적인 총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이 남기신 전통예술의 유산은 궁중의식가무(宮中儀式歌舞)로부터 농군, 나무꾼의 넋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선인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정부에서는 1960년대에 이르러 사라져가는 각종 전통예술을 조사 발굴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59종의 중요 무형문화재를 지정함과 동시에 보호·전수에 주력하게 된 일은 다행한 업적입니다.

그동안 우리 전통예술은 숱한 고난과 학대를 겪어왔습니다. 그릇된 양반들의 발길에 짓밟히기도 했고 식민지가 되었던 이 땅에서는 대부분의 전통예술이 설 곳 조차 없었습니다. 때로는 기방(妓房)의 술상 밑에 숨어 있기도 했고 무격의 무의식에 온존하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학대와 굶주림에 못 이겨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외로운 산골에서 숨을 거두어 버린 종목도 있었습니다.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할퀴고 찢기어 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꼴이 되어 남아 있기도 합니다.

한편 고향을 잃고 가족을 두고 헐벗은 채로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저 가면(假面)과 사자(獅子)를 보십시오!이북 고향 땅이 그리워 그리워서 애처롭게 흐느끼는 저 서도(西道)소리와 피리소리를 들어보십시오!전통예술 가운데에는 이처럼 조국 분단의 서러움을 안고 통일의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종목도 있습니다.

△ ‘3·1 민속문화제’(영산쇠머리대기)

이렇듯 역경에 시달려 온 우리 전통예술을 이제는 온 국민 자신의 것으로 길이 간직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전통 민속예술의 멋과 얼을 우리 것으로 되찾아 승화시키는 일도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큰 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형문화재나 우리 인간문화재는 이제 정부의 보호 만을 받고 있을 진열품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혈관에는 전통예술이 시원(胎原)하던 태고적 그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조상들의 뜨거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종목이 일상 생활과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또 우리의 기예능(技藝能)이 완전한 것이 못 된다 할지라도 쉽게 공감이 갈 것이며 저절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 인간문화재들은 지정 무형문화재의 원형을 그대로 지키고 이어줄 임무 만을 맡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으로서 이 시대의 새로운 전통예술을 창조하는 일은 우리들의 분야가 아닙니다. 예술은 살아 있는 것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임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원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천부적인 소질로 명인대가(名人大家)의 경지에 이르는 길 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 수문장

꼭 언급하여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우리의 작업은 전통예술의 수원지(水源池)로서 갖게 될 것이며, 이 수원지를 통해서 오늘에 창출될 주체성 있는 우리의 예술이 피어나게 될 것을 충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한국인간문화재 연합회에서는 이번 종합예술제를 시작으로 지방 공연을 가질 예정이며 공예품전시회도 마련해서 국민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전통예술의 바탕이 국민 생활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오니 끊임없는 성원과 아낌없는 꾸짖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전통예술이 온 국민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일상 생활에 뿌리박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달리 존립할 수 없다는 엄연한 법칙을 우 리는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정 문화재는 이미 민족적인 보배이기 때문에 안이(安易)한 복고조(復古調)도 아니며 값싼 관광자원은 물론 아닙니다. 이번 종합예술제는 오로지 국민 여러분과 숨결을 같이하는 공동의 광장일 것을 진심으로 바랄 뿐임을 밝혀 둡니다.

다시 한 번 숙연한 몸가짐으로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편달을 바라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1978년 3월 1일
한국인간문화재 연합회장 조 성 국


이상의 취지문은 선생이 초안한 것을 당시 이 일을 추진하는데 주축이 되었던 몇 분과 또 나도 말석을 차지하여 밤새워 축조 심의했던 것입니다.

지금 보아도 선생의 앞을 내다보시는 안목에 감탄케 됩니다.
선생의 회갑잔치는 ‘영산줄다리기 쇠머리대기’(소민원,1978)라는 알찬 민속지(民俗誌)의 출판으로 대신 했었습니다.

서문은 임석재 선생이 쓰셨는데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에 대해 이를 지정하기 위하여 담당 조사자가 현지를 답사하여 그 보고 문헌을 작성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 문헌은 아무리 면밀히 조사하여 작성했다 하여도 외지인의 힘으로써는 누락과 미비가 있어 수박 겉핥기의 문헌이 된 모양이다. 이런 문헌에 미흡하게 여긴 영산 사람들은 올바르고 정확한 문헌 작성을 바랐으리라. 이런 지방인의 바람을 조성국 씨는 구현시키려 했다.

조성국 씨는 영산의 본토박이 인사다. 그는 영산에서 낳고, 자라고, 장가가고 살림하고 하면서 50고개를 넘긴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산의 지리적 조건이며 지역적 역사는 물론, 그 지방의 사회성, 경제 상황, 문화성, 민심의 기미까지 현미경으로 검고(檢考)하듯이 샅샅이 검고하여 효달(曉達)하고 있는 분이다.

이러한 인사가 자기 고장의 민속 문화를 문헌화하려 드니 그것은 올바르고 정확하고 타지인(他地人)으로서는 규지(窺知)할 수 없는 것까지 갖추어서 완벽한 문헌을 꾸몄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중략) 조성국 씨의 향토문화에 대한 이러한 문헌화의 작업 태도와 기능은 다른 지방의 향토문화 연구가의 범례가 될 것이다.

△ ‘3·1 민속문화제’(영산줄다리기)

지방 인사로서 자기 고장의 문화를 학적으로 구명하고 이를 문헌화한 사람은 여태까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러한 점으로 모 면 조성국 씨는 향토문화의 문헌화 작업의 효시자(曉矢者)가 된 셈이다(후략)…”
한 분은 향토문화를 북돋기 위한 실천자요, 또 한 분은 이 방면의 전문학자로서 평생을 끈끈한 정으로 손잡았던 큰 어른이셨습니다.

넥타이를 맨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영산 바닥을 휩쓸면서 줄다리며 쇠머리 대는 데, 미쳐버렸던 선생은 남은 신명 다 풀지 못하시고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영산 고을에서, 아니 젊음이 솟구치는 대학의 넓은 마당에서 그의 줄다리기는 오늘도 살아 꿈틀대고 있습니다.소신껏 사시다가 홀홀히 가 버리신 일봉 조성국 선생님, 세상이 하 요상타 보니 당신이 더욱 그리워지는군요.

후학들이 엮은 이 『화보로 보는 ‘영산줄’과 ‘대학줄’』을 꼭 살피셔서 잘잘못을 일깨워 주셔야 할텐데….
그리운 조성국 선생님 부디 명복(冥福)하옵소서.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