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칼럼]비극적이지 않은 ‘비극(Tragedie)’의 아이러니
[이근수의 무용칼럼]비극적이지 않은 ‘비극(Tragedie)’의 아이러니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5.04.3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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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1999년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안은미의 ‘무지개다방’은 전연희를 비롯한 6명의 남녀무용수들을 밝은 조명아래 전라로 출연시켜 관심을 모은 작품이었다.

2003년 뉴욕의 밤(BAM)극장에서 본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역시 모든 출연자들이 공연의 클라이막스를 전라로 장식하며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성남아트센터가 프랑스 국립안무센터-발레 뒤 노르(Ballet du Nord)의 예술감독 올리비아 뒤보아(Olivier Dubois)를 초청하여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비극(Tragedie.4.10~11)'을 보면서 오래 전에 보았던 이들 작품이 떠올랐다.

마케팅을 위한 작품의 캐치프레이즈는 남녀 각각 9명씩 18명의 무용수가 90분 공연시간 내내 전라로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나신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무대 뒷면에 내려진 주렴을 헤치고 무용수들이 정면으로 걸어 나온다. 양팔을 휘두르며 씩씩한 걸음걸이로 무대 끝까지 도착하면 좌측으로 90도 방향을 틀고 다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돌아 들어간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은 출렁거리고 성기는 털썩댄다.

처음엔 한 줄로 다음엔 두 줄, 세 줄로 늘어난 대열은 40분간 동일한 방향, 동일한 각도, 동일한 동작으로 활보를 계속한다. 발레리나같이 늘씬한 미모도, 수영 선수처럼 건장한 체격도 아닌 다양한 몸매들이 반복하는 동작에선 관능도 미감도 찾아보기 어렵다.

음향도 동일하게 단조로운 박자를 반복한다. 똑같은 음량으로 쿵쿵거리는 북소리에 맞춘 나신들의 행진은 감정이 배제된 군인들의 열병식을 보는 느낌이다.

퍼레이드에 이어 30분간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나신들의 짝짓기 놀이다. 남자와 여자 두 그룹으로 갈라서기도 하고 6명씩 세 그룹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때로는 둘씩 셋씩으로 묶여지기도 하면서 걷고 뛰고 흔들어대는 등 각인각색의 포즈를 취한다.

두 사람이 서로 접근했다가 멀어지고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서는 등 마치 교섭의 파트너를 발견하기 위한 탐색전을 벌이는 것 같다. 마지막 20분을 구성하는 카타르시스는 남녀들이 뒤엉켜 연출하는 광적인 무대다.

음향은 규칙적인 박자를 넘어 소란한 잡음으로 바뀌어 있다. 쌍쌍이 짝을 이룬 그들은 처음엔 몸을 밀착시키지 않은 채 성교의 체위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모두가 뒤엉켜버린다. 남과 여를 구별하지 않고 살과 살을 맞대며 혼음의 광란을 연출하는 것이다.

반구형의 무덤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언덕을 쌓던 사람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가 장막 뒤로 숨어든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남았던 비대한 체구의 여인마저 무대 뒤로 사라져갈 때 공연은 막이 내린다.

3부를 구성하는 카타르시스가 원시공동체의 기원의식을 연상케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비극’은 같은 날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국립무용단의 ‘제의’나 처녀를 산 채로 제물로 바치던 원시적 제사의식을 극화했던 스트라빈스키 원작인 ‘봄의 제전’과 비교된다.

그러나 '제의'가 역동적 음악과 섬세한 조명, 감각적인 의상과 조화된 춤을 통해 신과의 교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봄의 제전’이 탄탄한 음악적 모티브를 배경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나체 춤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면에서 이 작품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무용수들의 몸을 가감 없이 관객들에게 보여준 안무가의 과감함과 위축되지 않고 90분간 종횡무진 무대를 누빌 수 있는 무용수들의 강인한 체력이 인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안은미가 무지개다방에서 보여준 서정도 없고 봄의 제전에서 관객을 전율케 하던 신비스러움도 없었다.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구성된 문장에 비유할 수 있을까. 볼거리는 있지만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장에서 향기나 감동을 찾기는 어렵다. ‘올리비아 뒤보아에게 춤은 과연 무엇이고 왜 그는 나체에 집착할까?’란 의문을 갖게 만든 작품이었다.

비극이란 제명을 붙인 것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 그리스와 프랑스의 비극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라마트루기 형식 역시 고대 그리스비극의 원칙을 따라 퍼레이드, 에피소드, 카타르시스의 3단계로 구성했다고 한다.

비극을 특징짓는 핵심이 슬픔과 회한이라고 한다면 ‘비극’은 전혀 비극적이지 않다. 2007년과 2008년, 2011년에 이어 네 번째 그의 나체무용이 한국에 초청되었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캐럴린 칼슨(Carolyn Carlson)의 뒤를 이어 2014년부터 프랑스 국립안무센터의 예술감독을 맡게 된 그가 이제 누드의 집착에서 벗어나 예술성으로 승부하는 춤의 변신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