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사물(四物)의 이치를 알려준 최성구(崔聖九)옹
[특별기고]사물(四物)의 이치를 알려준 최성구(崔聖九)옹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5.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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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이란
요즈음도 풍물을 ‘농악’이라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풍물의 본디 이름은 지방에 따라서 달랐었다. 중부 지방에서는 ‘풍물’, 호남에서는 ‘풍장’, 영남에서는 ‘매구’ 또는 ‘풍물’이라 했다.

이 밖에도 섬나라 제주에서는 ‘걸궁’ 또 ‘걸굿’이라 했음을 자료로 전한다.농악이라 부르게 된 데는 다분히 이것을 얕잡아 보자는 뜻도 도사려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처럼 직업에 귀천이 없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농사꾼’이나 즐기는 음악이라는 생각에서 농악으로 그 본디의 예능이 좁혀진 것이다.‘풍물’이란 우리 모두의 대표적인 민족음악으로 길들여 온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풍물을 이루는 기본 악기 네 종류가 있는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꽹과리·징·북·장고이다. 이 네 악기를 통틀어 말할 때 우리는 ‘사물’이라 한다. 이들 사물의 생김새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설명을 약하기로 하고 각기 어떤 예능을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앞서 사물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음을 설명해 두는 것이 좋겠다.규모가 좀 큰 절(寺刹)에는 의례히 갖추고 있는 ‘절 사물’이 있었다. 절 사물에는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대종(大鐘)의 네 가지가 있다.

옛날에는 일반 민중이 쓰는 사물은 ‘민 사물’이라 하여 서로를 구별했던 것이다. ‘민 사물’, 즉 풍물에서의 사물하면 꽹과리·징·북·장고 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마지막 상쇠 ‘최성구’ 옹의 이야기
우리나라 떠돌이 예인집단(藝人集團) ‘남사당패’의 마지막 상쇠였던 최성구(崔聖九) 옹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 자기의 정확한 나이를 모를 만치, 아주 일찍 남사당패가 되어 평생을 떠돌며 꽹과리만 치다가 1977년 65세(?)쯤에 저 세상으로 가신 분이다.

“…꽹과리는 사람으로 치면 팔뚝의 맥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끊어지면 다 없는 것 아니겠어? 또 징이란 가슴의 고동이매 심장 소리지, 북은 목줄기에 선 굵은 동맥과 같은 것이여, 이 셋은 함께 어울리기도 하지만 제각기 두들겨대기도 하지, 그러나 이것을 살림 잘하는 마누라처럼 ‘북편 채편’(장고의 양면)을 도닥거려 하나로 얽어 놓은 것이 장고란 말이여, 하늘과 땅, 음과 양 그러니까 세상 이루어지는 이치와 똑같은 것이지, 이 이치를 요즘 사람들은 몰라주고 있어…. 꽹과리 하나만 놓고 봐도 ‘암쇠’, ‘숫쇠’가 있지, 젊은 사람은 꽹과리 소리 들어보면 시끄럽기만 해요. 딱한 일이지. 쯧쯧(한숨을 쉰다)”

▲ 최성구 선생님
최성구 옹의 이 사물의 분석은 어느덧 동양 철학의 세계로 우리를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하기는 요즘 풍물소리를 들어보면 시끄러운 면도 없지 않다. 오랜 세월을 거치질 못하고 보니 그저 흉내를 내는 데서 오는 것이리라.

최성구 옹의 꽹과리를 듣노라면 타악기의 소리가 흡사 현악기처럼 들릴 때가 있다. 최옹의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억에 생생하다.

“…꽹과리를 왼손에 들고, 바른손에 쥔 ‘채’로 치게 되는데 소리를 딱 끊으려 할 때에는 왼 손바닥이 꽹과리의 안 편에 찰싹 붙어야 해요. 손금까지도 쫙 펴서 붙여야 하는 것이야. 오묘한 소리의 높낮이는 왼 손바닥을 뗐다 붙였다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그의 꽹과리 치는 모습을 보면 채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벼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아직도 전국에 몇 분의 뛰어난 상쇠들이 생존해 계시단다.

그런데 모두가 90세를 넘으신 노인들이시니 서둘러서 그 ‘기예(技藝)’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다시 생활 속에 뿌리내려지기를 옛날에는 마을과 마을 사이의 급한 연락을 할 때 징을 울려댔다.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 또는 다급한 난리가 나도 징소리로 신호를 보냈었다.

그러기에 사물 가운데서도 징소리는 꽹과리에 못지않게 우리 마음의 깊숙한 데까지를 건드려 주었었다.35년간 일본 사람들의 억압을 받다가 해방이 된 1945년, 그 때에는 징소리만 들어도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었다. 더구나 사물을 갖추어 멋들어진 풍물가락이 울리게 되면,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었다.

그런데 사물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흥취는 그대로 들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희열이 솟아오르면서 온몸으로 확산되는, 웅비(雄飛)하는 춤사위였다. 그것은 마음에서 몸으로 승화되는 생명의 숨통이었다. 이 풍물가락을 반주삼아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고, 고기를 잡았으며, 축제를 벌였고, ‘한풀이’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가슴 뜨거운 ‘최성구’ 옹의 뜻과 마음을 되살려 보자. 마을마다 ‘사물’을 갖추어 당장은 서툴더라도 옛 조상의 풍물가락이 마음속에 닿을 때까지 치고 또 쳐 보자!

풍물이란 훌륭한 민족의 소리이고 보면 어느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꼭 해낼만한 가치가 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일러 ‘…두드리면 음악이 되고, 손을 들면 춤이 되는 민족…’이라고 했다.

오랜 역사의 슬기로 다듬어져 전하는 풍물이 다시금 우리의 마음에서 삶의 소리이자 근로악(勤勞樂)으로 뿌리 내리게 되어야 한다. 신명지고 우렁찬 꽹과리·징·북·장고 사물이 협화하는 소리, 약동하는 소리가 못내 아쉽고도 그리운 오늘과 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