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소소한 일상이 주는 지속가능한 행복 -라 바야데르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소소한 일상이 주는 지속가능한 행복 -라 바야데르
  • 김순정(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5.06.1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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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일상과 무대의 간격은 크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조화롭게 심신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일이 무용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얼마 전 서울사이버대학교 차이코프스키홀에서 열린 IOTPD(국제무용수직업전환지원기구)의 직업전환에 관한 세미나를 경청하며 그런 생각을 가슴 깊이 되새겼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위스에서 온 사례발표자는 판사, 무용학교 사무처장, 이벤트 매니저, 물리치료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성공적인 직업전환을 이룬 이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무용수로 활동하면서도, 무용수 이후의 또 다른 삶을 준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고도 설득력 있게 발표했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개인의 결정 다음으로 꼽는 것은 대체로 가족의 중요성이었다. 가족이 있었기에 더 큰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무용수가 지닌 덕목인 인내심, 몰입, 열정, 시간관념 등을 새로운 직업에 뛰어들 때 창의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예술을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고 고국을 등졌던 예술가들의 말로가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던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다른 것보다도 우선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했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가 바라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지만 쉽게 얻기는 힘든 것.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일은 사실 쉽지가 않다.

균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역동적으로 외부환경과 맞춰나갈 때 이룰 수 있다. 스스로의 움직임과 노력을 멈추는 순간 균형도 깨진다. 발레동작 훼떼(Fouette)처럼 팽이가 힘차게 돌 때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원심력에 의해서도 돌아가지만 외부의 자극(채찍)이 가해지면 놀랄 만큼 빠르게 돌며 몸의 중심축이 바로 서게 된다.

 

▲폰테인(니키야)과 누레예프(솔라르)의 2인무,런던 코벤트가든,1963

전 세계 발레인을 기죽게 했던 전천후 균형의 여제, 프랑스의 발레요정 실비 기옘. 그녀의 은퇴공연 소식과 함께 놀랍게도 박세은이 파리오페라발레단 <라 바야데르> 주역인 니키야를 맡아 얼마 전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에서 공연했다.

마린스키극장은 김기민이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발레의 표상과도 같은 곳이다. 영화 <블랙 스완>의 안무가이자 파리오페라의 새로운 수장이 된 밀피예의 총애를 받는 박세은과 한인 3세로 과거 마린스키발레단 주역을 한 뛰어난 발레리노 블라디미르 킴의 후예로 불리우는 김기민의 활약이 기대되는 것은 나이에 비해 그들의 삶을 대하는 유연한 태도와 갈고닦은 기량의 적절한 균형에 있다.

 

▲안나파블로바(니키야),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1903

라 바야데르(러시아어 원제: 바야데르카, 사원에 소속된 여자무용수란 뜻)는 1877년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프티파에 의해 초연되었다. 인도 사원의 무희와 젊은 전사와의 사랑. 무희의 사랑을 갈구하는 브라만 승려. 연적인 니키야를 죽이게 되는 높은 신분의 여인 감자티가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이고 물동이 춤, 불춤, 꽃춤, 부채춤, 북춤, 스카프 춤 등 군무가 흥미롭고 풍성하다.

라 바야데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긴 스카프를 남녀주인공이 함께 들고 추는 2막의 2인무이다. 솔라르가 멀리서 긴 천의 한쪽을 잡고 있으면 니키야는 반대쪽에서 천의 다른 끝을 잡고 한 발로 서거나 돌면서 균형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절묘하게 아슬아슬하면서도 슬프다.

익숙했던 국립발레단을 떠나 인생의 변화를 꿈꾸며 영국으로 2년간의 유학을 선택한 것은 1987년 봄이었다. 무대와 병행하며 발레교수법에 관한 석사논문을 무려 4년 반 만에 허덕이며 겨우 끝낸 직후였다.

처음 본 전막의 라 바야데르는 1989년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였다. 객원주역으로 마린스키발레단 루지마토프(솔라르)와 아실무라토바(니키야), 그리고 로열발레의 실비 기옘(감자티)이 출연했다. 한 무대에서 당대에 내가 좋아하는 세 사람을 동시에 보게 된 것이다.

실로 별들의 전쟁, 눈이 부신다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무대의 모든 것에 도취되어 한껏 빠져들었던 후에는 가족이 기다리는 옥스퍼드의 작은 집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대와 일상은 현저히 다르지만 모두가 가치 있다. 무대와 소소한 일상은 언제나 혼재되어 내 삶을 물들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