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소중한 김숙자 선생과 만남
[특별기고]소중한 김숙자 선생과 만남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6.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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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자
떠나신 지 벌써 오래이십니다.

나에게는 잊혀지질 않는 큰 춤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지난 1991년 세상을 떠나신 김숙자 여사이십니다.

1927년 ‘안성’의 세습무가 출신이신 그는 예순다섯으로 태어나신 생애를 마감하실 때까지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기구한 역경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예순다섯이면 넉넉하진 못해도 평균 수명은 된다고 하겠지만, 그의 경우는 아쉽기 그지없었습니다.
열 살 이전에 무속의 예능을 닦기 시작한 이래, 어정(무가)와 춤, 소리, 줄타기까지를 익혀 스무 살에는 무용학원을 차릴 만큼 조숙하기도 했었지만 그의 생애에는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가난함에 이기질 못하여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음을 실토한 바 있었습니다.

1947년 타향인 충청남도 대전으로 흘러와 첫 무용학원을 차리면서, 한 때 주변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간 자신이 무가(巫家) 출신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면서 마음 속은 그저 허전하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60년대 초, 갑자기 대전을 떠나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 유명했던 춤꾼 김숙자 여사를 만난 것은 1968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닷새는 그의 학원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서울시립무용단장 ‘문일지’ 씨와 함께 김숙자 여사의 ‘도살풀이춤’에 아주 빠지고 말았었습니다.

“…선생님이 추고 계신 ‘도살풀이’는 예사 ‘살풀이’가 아니외다. 무속신앙의 물결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도살풀이’ 그저 가슴을 가득하게 하는군요…”

나의 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는 덥썩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문일지’ 단장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요?
춤은 그만 두시고 목사가 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 김숙자 선생님의 도살풀이 춤
‘도살풀이 큰 마당’

1971년 봄, 서울 남산에 있었던 ‘드라마센터’에서 김숙자 춤꾼의 첫번째 무속무용 발표회였던 ‘도살풀이 큰 마당’이 열렸습니다. 여러 춤꾼들과 신문, 방송이 힘을 써주어 대단한 성과였습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우수한 유명 춤꾼들이 김숙자 여사의 춤연구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몹시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무속춤’이 바로 민속춤의 깊숙한 바탕이라 외쳐대는 ‘심우성’에 대한 비아냥과 ‘김숙자’에 대한 곱지 않은 눈초리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김숙자 선생의 춤연구소에 “한국무속예술보존회”라는 큼지막한 간판까지 보이게 되자 더욱 입방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무속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이라 전국의 무당과 박수들이 똘똘 뭉쳐 전국적인 조직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경기도 출신의 이용우, 임선문, 조한춘, 정일동, 부산 출신의 김석출, 진도의 박병천, 황해도 출신의 우옥주, 김금화, 정학봉 들이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YMCA 강당 등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여 무속예술의 진국을 보여주고자, 서서히 학술적 발표회까지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껏 무속 자체를 업신여겨 온 일부 학자들은 더욱 못 마땅히 취급하기에, 무속예술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조사보고서를 수없이 냈건만 깡그리 거부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무용가들을 비롯하여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전문인들의 관심이 놀랍게 힘을 얻게 되면서, “한국무속예술보존회”와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전국의 대표적인 무속인들에 대한 인식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습니다.

전통문화의 바탕은 토착신앙의 하나인 무속에서도 찾아야 함을 공감하게 되면서 “한국무속예술보존회”를 찾는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언제였던가 김숙자 여사는 이렇게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젠 당장 죽어도 눈을 감겠어요. 조상 대대로 이어온 무속예술을 이처럼 대접해 주니 아무런 원이 없어요. 그까짓 인간문화재가 무슨 소용이에요. 그저 우리 무속을 위해 힘써주신 여러분이 고마울 뿐이에요…”

눈자위는 촉촉이 젖으면서도 표정은 환했습니다. 그로부터 우여곡절 끝에 1990년 그의 빼어난 무속춤 ‘도살풀이’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이 되고 그는 당당히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위촉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황해도 출신 큰 무당 ‘우옥주’ 여사는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면서 출입조차도 못하시게 되니 이를 어쩌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춤판의 큰 눈이 가시다
이 일을 어찌하랴!

김숙자 여사는 인간문화재가 된 지, 불과 1년 만에 산더미만큼이나 일을 남기신 채 눈도 감질 못하고 이승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평생 춤만 추시다가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는 평온을 찾는가 했는데 어처구니없이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허허 앓아 누우셨던 우옥주 여사도 함께 가시다니….
벌써 오래 전의 일이군요. 1987년 여름이었습니다.

일본 ‘이와테현’에서 열린 <하야치네 페스티벌>에 우옥주, 김숙자 그리고 나도 함께 초청을 받았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표적인 ‘토착신앙’을 보여주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우옥주 여사의 ‘대감굿’, 김숙자 여사의 ‘도살풀이춤’, 그리고 심우성의 작품 ‘쌍두아’가 무속의 골격에 가깝고 깊다하여 함께 초청을 받았으니 이런 다행스런 일이 있겠습니까?

넓은 마당, 큰 정자나무 아래 ‘굿청’을 차려 놓고 먼저 우옥주 여사가 황해도의 대표적인 대동굿 ‘만구대탁굿’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 김숙자 선생님의 도살풀이 춤
화려한 무복 차림으로 ‘대감굿’을 추고 있는 저 우옥주 여사의 당돌하면서도 의젓함이여….
나는 김숙자 여사와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묵묵히 굿판을 응시하시던 김여사가 불쑥 입을 여신다.

“심선생, 저 춤, 좀 보세요. 눈이 있잖아요. 때때로 가끔씩 가끔씩 사이를 살펴주는 저 눈, 눈이 있어요!”
“눈, 이라니요?”
“네! 흐르는 물줄기에도 그 흐름을 살펴주는 소용돌이가 있듯이 춤에도 분명한, 눈이 있어야 하는 법이에요…”
...허허, 이 고매한 ‘춤 철학’을 내 어이 짐작이나 할 수 있으리야…
곰곰이 생각컨대 김숙자 선생 당신이 바로 이 시대 우리 춤의 ‘눈’이 아니실까?
아둔한 나로 하여금 우리 춤의 본디를 그나마 살피게 하여 주신 ‘눈’은 바로 김숙자 선생 당신이 아니실까요?
우옥주 선생! 김숙자 선생!
그 밝은 눈초리로 부디 명복 명복 하옵소서….
김숙자 선생 안녕히 가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