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섭의 여행칼럼]연무 속에 묻힌 황제의 공간 베이징
[정희섭의 여행칼럼]연무 속에 묻힌 황제의 공간 베이징
  • 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
  • 승인 2015.06.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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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교수

허락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자주색의 금지된 공간’ 자금성(紫禁城)을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흥선대원군은 황제를 알현(謁見)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수많은 관문을 경험하고 조선 임금의 초라한 거처를 생각했으며, 조선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원망 속에서도 경복궁의 중건을 지시했다.

백성들이 담장 밖에서 지르는 소리가 왕의 침소까지 전해지며, 무뢰한들이 던지는 돌이 왕이 정사를 돌보는 궁궐의 앞에까지 이르는 것을 본 그는 큰 비통함에 빠졌을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Forbidden City’자금성을 뒤편의 경산공원(景山公園) 위에 올라 바라보는 데, 도시를 감싸고 있는 짚은 연무 속에서 왕조의 번영과 몰락이 묘한 페이소스(Pathos)를 만들어 낸다.

황제는 승하(昇遐)하기 전에 이 성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고, 평민들은 평생에 한 번이라도 이 성에 들어갈 일이 없었던 것을 떠올려보니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초라한 모습과 저 아래 성내(城內)를 떼 지어 활보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교차된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베이징은 한 낮인데도 짙은 미세먼지 때문에 숨을 쉬는 게 불편할 정도였고,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도시 전체가 병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길거리는 서울에서도 몇 대 밖에 볼 수 없는 최고급 차들이 즐비해서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경제의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런 것이 결코 부럽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선한 공기와 좋은 물이면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은행의 현금인출기에서 여행 중 사용할 약간의 현금을 뽑았는데 그 중 몇 장이 위폐(僞幣)인 것을 음식점에서 돈을 지불할 때 알고는 망연자실하며 이 도시의 앞날을 걱정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공산체제인 중국을 열 번 이상 방문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속칭 ‘멘붕’에 빠졌다. 요새 들어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며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는 중국 친구의 말에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황후의 쉼터 이화원(?和園)의 도도함, 황실의 제단 천단공원(天壇公園)의 위용, 못 먹는 것 빼고 다 먹을 수 있는 왕푸징 거리의 식도락, 온갖 종류의 술집이 넘쳐나는 산리툰 거리, 베이징 선남선녀(善男善女)의 야간 데이트 코스 호우하이, 그리고 조양극장에서 벌어지는 세계 최고 난이도의 서커스, 현존하는 모든 것의 모조품이 있는 것 같은 시우쉐이지에(秀水街) 시장. 베이징은 비록 미세먼지로 자욱했지만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를 이 도시에서 더 강하게 느꼈던 것은 탁한 공기와 더불어 옥에 티가 아닐 수 없다. 마오쩌뚱 주석이 지향했던 평등한 인민공화국의 이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연무 속에 가려진 베이징이 말하는 것 같다. “100년 후에 사라질 것이라고 여겨졌던 중국이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지금의 성장통(成長痛)을 극복하고 가장 멋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