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단색화의 세계화를 둘러싼 논의의 필요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단색화의 세계화를 둘러싼 논의의 필요성
  • 윤진섭 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5.06.2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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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대학 명예교수
197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일어난 ‘단색화(Dansaekhwa)’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전위예술 운동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전위예술론’의 저자인 레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1907-63))는 전위예술 운동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는데, 곧 이념과 사상을 같이 하는 동반자적 결속체로서의 그룹과 선언문(manifesto), 그리고 예술적 주장을 펼치기 위한 잡지 등이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단색화를 이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70년대의 단색화는 그룹도 아니었을 뿐더러 단색의 이념을 펼치기 위한 기관지나 그 어떤 선언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보다 좀 더 일찍 전위운동을 시작한<A.G(Avant-garde)>나 <S.T(Space & Time)>의 활동이 전위예술 본래의 개념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70년대 단색화의 주역인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등이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걸친 비정형회화(앵포르멜:Informel)의 주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시기에 이들은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체험을 실존적 입장에서 물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은 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지리멸렬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혼란기를 헤집고 새로운 전위적 이념의 결속체를 이룬 것이 바로 <A.G>와 <S.T>였다. 70년대 중반, <A.G>와 <S.T>의 멤버들이 대거 ‘에꼴 드 서울(Ecole de Seoul)’에 가담하게 된 것과 1975년 <A.G> 그룹의 해체와는 밀접한 정치적 관계가 있다. 이 무렵, 이우환의 빈번한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모노파(物派:Monoha)의 한국 내 전파와 관련이 있고, 당시 한국에서 차지하는 이우환의 위상이나 인기로 미루어볼 때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단색화(Dansaekhwa)를 누가 맨 먼저 시도했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1960년대 후반에 징후가 나타나서 70년대 초반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1972년 당시 제1회 [앙데팡당(Independent)]전에 출품한 이동엽, 허황 등의 작품에서 단색화적 경향이 느껴지는데, 그 이전에도 가령 <A.G>라는 잡지의 표지에 실린 서승원의 <동시성>(1969)에서 단색화의 뚜렷한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단색화는 [서울현대미술제], [에끌 드 서울] 등을 통해 70년대 중반 무렵이면 이미 화단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획일화의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을 기획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다.

70년대의 단색화는 이른바 ‘촉각성(Tactility), ‘정신성(Spirit)’, ‘수행성(Performance)’ 등의 특징을 지닌 작가들(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The Art of Dansaekhwa)]전’의 초대작가들인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으로 대표되는) 외에도 기하학적 패턴의 반복을 기반으로 하는 진옥선과 파이프의 이미지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이승조, 촛농을 캔버스에 떨어뜨려 점의 반복을 보여준 홍민표 등등이 있으며, 천의 물성을 강조하여 회화의 일루젼을 실험한 김용익, 캔버스의 아사 천에 단색을 사용, 천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박장년, 실의 풍성한 물성을 조형적으로 실험한 김홍석 등등 그 유형과 재료는 실로 다양하다.

‘단색화(Dansaekhwa)’ 작가 중에서 가장 요체에 접근한 작가는 정상화이다. 매우 금욕적인 그의 작업은 캔버스의 주름을 잡아 사각의 모듈 패턴을 만들고 그 안에 반복적으로 물감을 집어넣고 떼는 작업이 주축을 이룬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축을 이루었던 몸(body), 즉, 신체성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그런 선구자적 요소가 있었다.

즉, 그의 캔버스 표면은 반복적인 행위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인 것이며 그것은 곧 대지에 다름 아니다. 정상화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캔버스에 검정색 물감을 수십 차례 바르고 그 위에 수차례에 걸쳐 물감을 스프레이로 분사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김기린, 신문지에 볼펜으로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연필로 까맣게 칠하는 최병소, 흰색 캔버스 위에 회색 물감으로 희미한 흔적을 남기는 이동엽 등이 모두 피부와 관련, 회화에서의 신체성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다.

또한 캔버스에 밑칠을 하고 연필로 선을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으로 긋는 박서보와 마대로 짠 캔버스의 뒤에서 걸쭉하게 갠 유성물감을 밀어넣는 하종현의 배압법(Baeapbub), 생 아사천에 짙은 갈색과 청색을 겹쳐 칠해서 묽게 갠 물감이 부드럽게 번지는 마치 동양화의 선염법을 연상시키는 윤형근, 걸쭉하게 푼 한지를 캔버스에 붓고 손으로 매만져 조형적 형태를 만드는 정창섭이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들이다.

이우환은 어렸을 때 배운 서예의 기본, 즉 점과 선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 점에서 비롯된다는 주역의 깊은 사상이 그의 작품의 기본적인 컨셉을 이룬다. 바둑을 둘 때 위에서 바둑돌을 내리꽂으면 바둑 판면이 팽팽하게 긴장한다는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시골의 전통 가옥에 있는 오지 굴뚝에 켜켜이 앉은 검댕을 연상시키는 김기린의 검정회화와 한국의 토담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공법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 등은 모두 한국의 전통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시각중심적 사고의 소산인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다른 한국의 촉각중심적 사유방식을 이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물론 형태면에서 보면 애드 라인하르트의 검정회화와 김기린의 그림이 매우 비슷한 데가 있지만 말이다.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뒤늦게 나타난 한국의 단색화가 신기할 수도 있고 또 엉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2세대의 단색화 작가들이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 후기산업사회에 어울리는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시점에서 왜 서양에서는 끝난 미니멀리즘이 한국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며 각기 다른 회화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을 단지 호기심의 차원, 혹은 진부한 용어이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에 이어 국제갤러리의 노력에 의해 최근 단색화가 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의 카탈로그 서문에 단색화를 ‘Korean Monochrome Painting’이 아닌 ‘Dansaekhwa’로 표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우리의 것은 우리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것을 중성적인 의미를 지닌 'Monochrome'이라는 말로 표기하면 차별성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이름을 얻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상호 접촉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욱 풍성한 인류 문화 자원을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시켜 볼 때, 단색화에 대한 논의가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면 우리는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단색화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많은 서구의 미술관계자들이 한국의 단색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다양한 SNS 매체가 존재하는 현재의 문명적 상황에서 편협한 민족적 내셔널리즘이나 국수주의적 사고는 필요치 않다. 세계는 다양한 꽃이 어우러진 화단처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또 그럴 때 고유의 가치를 지닌 문화가 빛을 발한다.

지금 여기서 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했느냐 혹은 대안적 모더니즘이 존재하느냐 하는 논의는 적당치 않다고 본다. IT산업이 발달한 한국사회에도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후기근대(Post-modern) 양상이 혼재한다. 단색화를 둘러싸고 보다 열린 시각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