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예술장사와 예술작품 장사? ②커다란 곰 인형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예술장사와 예술작품 장사? ②커다란 곰 인형
  •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5.07.1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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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미술시장은 커다란 곰 인형과 비슷하다. 연애할 때이거나 약간의 취중에 선물로 받은 어른만한 곰 인형은 언제나 버릴 수 없는 애물단지다.

받을 때야 좋지만 방 한 켠에서 뒹굴거리는 곰 인형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으로 크다. 방 크기가 넓다면 그냥 어느 곳에 장식으로 두면 되지만 살림살이 도구 두기도 빠듯한 공간에서는 하릴없이 자리만 차지한다. 그것을 선물한 이와 헤어졌다거나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면 명분을 가지고 버리기라도 할 터인데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품은 참으로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구매자의 입장에서 보면 3년 전에 산 작품이 가격이 올랐다면 흐뭇하겠지만 그 작품을 그린 이가 더 이상 예술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사 갈 때 버릴 수밖에 없는 물건이 된다. 구매가격이 50만원 100만원이 넘어간다면 버리기도 아깝다. 이것은 헤어진 애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버리지 못하는 커다란 곰 인형이 되고 만다.

곰 인형을 파는 인형가게 주인장은 어쩌다 팔리는 커다란 곰 인형을 대표 상품인 양 앞자리에 배치한다. 사실은 앞자리가 아니라 어느 곳에 두더라도 덩치 때문에 자존을 보여주므로 어디에 두어도 상관없다. 인형가게 주인장은 연인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 곰 인형을 표 나게 보여준다. 인형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를 판매한다. 사랑의 깊이만큼 인형의 크기가 커진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대체로 남성이 구매하여 여성에게 제공하는 방식이다.

장식적이거나 귀엽다거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깊이나 크기로 그것을 매매시키고 만다. 거창하게 사회의 구성인자를 생산하는 미래에 대한 투자로서 말이다. 인형가게 주인은 커다란 곰 인형을 팔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크기만큼 인형의 크기를 가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뿐이다.

예술과 예술작품은 딴 몸이면서 한마음이거나 한 몸이면서 다른 마음이다. 그래서 예술이거나 예술작품이거나 상관없이 매매 자체가 힘겹다. 지난호에 밝힌 바 있지만 예술작품을 팔고자 한다면 예술이 먼저 거래가 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은 돈으로 거래되지만 예술은 열정과 미래가 신용으로 매매된다. 세상에 숨겨진 정보가 대다수 노출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열정과 미래를 보증하지 않고서는 예술작품 거래 자체가 어렵다.

5~6년전 만 하더라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40대 중후반의 미술가들의 미술작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일정 반열에 오르기 위해 미술작품으로 미술시장에 작전을 쓰던 이들도 사라졌다. 예술가는 아직 창창하고 팔팔한데 예술작품이 힘을 못쓰고 있다. 말 그대로 어찌 처분해야 할지 모르는 옛 애인의 곰 인형이다. 가치를 판매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 애정공세를 펼친 탓이다. 이를 거래한 화랑이나 갤러리스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누가 뭐라든 예술가는 예술작품이 팔려야 한다. 예술작품을 팔기위해서는 예술을 팔고 열정과 신용을 먼저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관공서나 기관에서 예술가들의 재능기부를 요하는 방식과는 다른 입장이다. 그렇다고 예술가더러 인형가게 사장님 하라는 말은 아니다. 예술가 더러 곰 인형 만드는 기술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반드시 돈과 바꾸어야 한다. 자칫 자신의 작품이 곰 인형으로 전락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쓰임새다. 예술작품과 곰 인형은 시장자체가 다르다. 다만, 그것을 파는 사장의 마음이나 판매에 대한 개념으로서 화랑주인이나 딜러는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