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사랑의 선물 그리고 어미거위이야기-신데렐라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사랑의 선물 그리고 어미거위이야기-신데렐라
  • 김순정(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5.07.16 22: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유월의 마지막 날 러시아를 향해 출발했다. 기내에서 요즘 신작영화가 무엇인지 살펴보다 <신데렐라>를 발견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해 하며 보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중단했다. 대신 40대 중년 남녀의 이야기 <위 아 영>을 공감하며 보았다. 신데렐라는 왠지 예전처럼 혼자서 몰래 봐야할 것만 같았다.

동화적인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일상에 마음이 먼저 간다. 동심이 주는 순수함과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나이는 이미 아니다. 신데렐라가 연상시킨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 새 비가 내리고 서늘한 모스크바 쉐레메체보공항에 도착했다.

새로운 고속도로가 공항에서 시내까지 생겨 이전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양 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을 보며 모스크바가 세계에서 1인당 녹지면적이 가장 높은 도시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런 숲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깊은 숲에 살던 동물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어떤 존재들이 조금씩 우리 곁에서 밀려나는 것 같기도 하여 아쉬웠다.

울창하고 검푸른 숲을 보니 왠지 어린 시절의 무수한 꿈과 몽상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 보았던 어린이잡지 <어깨동무> <새 벗>이 그리워진다. 한국 아동문학의 아버지 소파 방정환(1899-1931). 천도교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던 방정환이 일제강점기인 1921년 일본유학을 하던 중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전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펴낸 외국동화번역집<사랑의 선물>에 산드룡의 유리 구두가 실려 있었다.

▲ 배주윤과 강준하의 신데렐라

자연스레 신데렐라의 원작자인 샤를 페로(1628-1703)가 궁금해졌다.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페로는 23세부터 변호사로 일했고, 베르사이유 궁의 설계에도 종사했으며 루이14세의 재무장관 콜베르의 비서직으로도 일했다.

가난했던 콜베르가 상점직원에서 은행원으로 발탁되었던 유명한 이야기는 그의 정직하고 솔직한 품성에 기인한다.

그런 콜베르의 비서를 수행했던 페로의 성품도 짐작이 간다. 콜베르가 죽자 페로도 비서직을 잃게 된다. 그의 나이 이미 67세였다. 곧 아내를 잃은 페로는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며 펴낸 책이 민담을 엮은 <어미 거위 이야기(1697)>다. 이 안에 신데렐라, 즉 상드리옹 혹은 작은 유리 구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발레음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프로코피에프의 신데렐라를 택한다. 자하로프(1945), 세르게예프(1946), 애쉬턴(1948), 마기마랭(1985), 누례예프(1986), 마이요(1999)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신데렐라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 새롭게 창조해 왔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안무가나 무용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케하는 거대한 미궁과도 같은 힘을 지녔다.

희극적 요소, 극적 연기, 봄, 여름, 가을, 겨울 요정들의 고전적인 춤, 행복한 결말 등은 발레 <신데렐라>가 가지는 최고의 장점이며 이러한 이유로 안무가들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꿈과 희망을 주는 장치로 발레만한 것도 없을 듯하다.

1997년 국립발레단이 자하로프 안무의 <신데렐라> 공연을 올렸다. 주역으로는 배주윤, 김지영, 강준하, 이원국. <신데렐라> 무대를 보면서 아련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 비디오로 본 스트루치코바의 춤이었다. 그녀의 신데렐라를 닳도록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신데렐라가 주는 교훈을 삶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라이사 스트루치코바(1925-2005)를 직접 만나게 되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내가 뒤늦게 유학을 간 GITIS대학의 종신교수였으며 첫 1년간은 나의 지도교수였다. 그녀는 내가 러시아를 떠난 3년 뒤에 80세로 눈을 감았다.

신데렐라가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꿈과 희망이었을까? 그보다는 시련을 겪거나 소중한 구두 한 짝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용기 있게 무도회장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데렐라는 일깨워준다. 자신이 그토록 만나보고 싶은 실체가 바로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흔히 왕자로 상징되곤 하는 진실 혹은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