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박정임 ‘발탈’의 유래와 특징 ①
[특별기고]박정임 ‘발탈’의 유래와 특징 ①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7.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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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탈놀이라 하면 얼굴에 갖가지 탈을 쓰고 춤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제부터 살피고자 하는 ‘발탈’은 발탈꾼이 포장막 안에 누어서 발바닥에 오직 하나뿐인 탈을 씌우고 재담과 노래를 읊조리는 것이다.

포장 밖에서는 어릿광대가 서서 발탈꾼과 재담을 주고받으며 놀이를 진행한다. 참으로 소중한 민속예능의 유산이라 하겠다.

이러한 발탈에 대한 문헌자료는 전혀 없고, 앞장을 서서 명맥을 이어온 유랑 예인 출신, 고(故) 이동안(李東安, 1906~1995)옹으로부터 박정임(朴珽姙)은 소시로부터 제자로 발탈꾼과 잽이(악사)로 뒤를 잇게 되었다.

오늘의 중요 무형문화재 제79호 예능보유자 박정임 여사이다.

한편 고(故) 박해일(朴海一, 1923~2007)은 어릿광대를 맡았었다.

필자는 지난 1970년대에 서둘러 이동안 옹을 비롯하여 옛 발탈 관련 민속예인을 접촉하여 그들의 증언을 받았었다.

발탈의 발생과 변천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발탈의 전승 계보와 현존하는 놀이기구 및 연희본(演戱本) 등을 채록하여 그의 예능적 성격과 특징을 분석, 고찰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 중요 무형문화재 ‘발탈’ 예능보유자 박정임.

연세 많은 예능보유자들은 문헌자료는 없으면서도 옛날이야기 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발탈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군영의 위안 놀이로 놀아졌다. 단 한 사람의 등장인물인 ‘조기장사’는, 허름한 탈 인형을 사방을 둘러친 포장 안에서 밖으로 내밀어 조종하는데 발탈꾼(조종자)은 누워서 인형의 양팔을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포장 밖의 ‘어릿광대’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진행되는 이 특이한 인형놀이는 3현 6각(피리, 젓대, 해금, 장고) 등의 잽이들의 반주와 함께 진행되었다…”

발탈의 시원(始原)과 변천

앞서도 밝혔듯이 발탈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혀 없다. 지난 1980~90년대의 연희인들이 어려서 보았었다는 증언에 따르자면 아마도 한말(韓末) 내지 그 직후 무렵의 예인들이 연희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듯하다.

다음 소개하는 인명(人名) 및 증언 자료들은 복잡 다난하면서도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이동안 옹은 남사당패들이 놀던 발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친구 조동호(고인이 된 국악인)의 아버지 광대(廣大) 조갑철이 진위(振威, 지금의 평택) 장터에서 남사당놀이를 하였는데, 이때의 발탈은 종이탈을 발에 씌우는 방식이었으며, 팔꿈치와 팔목 두 곳에는 실패를 장치하고, 그 구멍에다 노끈을 연결시켜 팔이 움직이게 했다. 노끈은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했었다고 했다.

전태용(全泰龍, 1922~1990, 무속음악인)도 남사당패들이 하던 발탈은 노끈으로 조종했었다는 데는 뜻이 같았으나 노끈을 팔에 연결시키는 방법은 다소 달랐다고 한다.

김숙자가 직접 본 방법, 즉 어깨 부분 한 곳에만 노끈을 연결시켜서 그 팔이 움직이도록 조종하는 식이었던 것에 비하여(그림 1 참조) 전태용이 본 방법은 팔꿈치와 어께 등 두 곳에 노끈을 연결하여 팔이 움직이게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 유일한 출연자 ‘발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