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국악담론]젊은이들에게 주고픈 회상(回想)
[김승국의 국악담론]젊은이들에게 주고픈 회상(回想)
  •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
  • 승인 2015.07.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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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시인

사람들은 나를 전통예술 전문가 혹은 문화예술 전문가라고 부른다. 비밀인데 나는 아직도 전문가 대접을 받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런 나를 황송하게도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전통예술이나 문화예술에 관련된 자문 혹은 정책 수립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을 받아 활동한지도 꽤 오래 되었고, 주제넘게 학부나 대학원에서 전통예술 관련된 강의를 맡은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에서 중책을 맡고 있으니 전문가의 대열에는 속하고 있기는 하다.

사실 나는 예술계열 학부를 졸업한 것이 아니고,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굳이 나를 문화예술과 관련지어 갖다 붙여본다면 고등학교 때부터 시문학에 심취하여 시 쓰기를 좋아하여 뒤늦게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어쭙잖은 문학상을 몇 번 받았으니 따지고 보면 문화예술인이기는 하다.

이렇게 내가 너스레를 떠는 이유는 이 글을 읽어줄 젊은이들에게 나의 지난날의 흔적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깜깜한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는 심정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세계적인 건축가였던 고 김수근 회장이 이끄는 공간그룹 산하 ‘월간 공간’에 취직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가까운 시단 선배로서 당시 편집장이었던 조정권 선배가 나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월간 공간’의 편집부 기자로서 내게 맡겨진 업무량은 젊은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컸다.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일은 끝이 없었다.

훗날 깨달은 것인데 그러한 엄청난 일을 처리해 가면서 건축, 미술, 연극, 음악, 국악, 무용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폭넓은 이해와 지식을 갖추게 되는 기회와 행운을 가졌던 것이다. 같은 직장 내에서 업무량이 많다고 투덜대는 젊은이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남들에 비해 과다한 업무가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말 해주고 싶다.

나는 건축 설계의 메카였던 ‘공간’에서 서울의 대표적 문화공간들이 설계되는 과정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도시공간이 디자인 되는 거시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김덕수 사물놀이와 공옥진의 병신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전통예술의 재창조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나에게 전환점이 왔다. 지금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가 된 ‘한국국악예술학교’에서 나에게 영어교사로 올 의사가 있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봉급은 ‘공간’이 학교보다 더 좋았으나 나는 주저 없이 교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선생님들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때 훗날 나도 선생님이 되어 나와 같은 불우한 환경 속의 학생들을 돕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로 부임하자마자 학급담임을 맡은 나는 커다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학급담임이라면 장차 전통예술인으로 활동을 하게 될 학급 학생들에게 마땅히 진로 상담을 해주어야하는데, 학급담임으로서 학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에 절망감과 자괴감이 들었다.

학급담임으로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진로지도를 해주기 위해서는 전통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지식도 필요하고, 전통예술계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전통예술계의 전망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겨있는 전통예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갖추고 있지 못했던 점이 무엇보다도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학생들에게 올바르고 충실한 진로 상담을 해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전통예술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전통공연예술 현장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통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하여 대형서점으로 달려갔다. 가서 민속악과 민속무용, 그리고 전통연희와 관련된 전문서적을 뒤졌으나 참고할만한 서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판소리의 정권진, 대금의 한범수, 이생강, 가곡의 김월하, 민요의 이소향, 이춘희, 농악에 전사종, 임광식, 이수영, 거문고의 김영재, 해금의 최태현, 피리의 김광복, 한상일 등 당대 최고의 예인들이 출강을 하고 있어서 그분들을 졸라 교무실에서 개별적인 인터뷰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때로는 그분들과 밖에서 식사자리, 술자리, 취미 모임을 자주 가지며 전통예술에 대한 이론적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와 아울러 전통공연예술 현장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런 나의 적극적인 자세가 장차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발을 옮겨 놓게 된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아예 전공을 영어영문학에서 국악이론으로 바꾸고 대학원 석박사과정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술고등학교에 나와 같이 근무하고 있었던 많은 인문과 교사들이 있었지만 나처럼 전공영역이 바뀐 교사는 흔치 않다. 자신에게 맡겨진 기본적 일을 충실히 하는 것도 잘 하는 일이지만, 더 나아가 보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으로 일을 찾아 매진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교훈을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나의 열정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중앙대 최상화 교수의 추천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예술진흥정책수립 TF 팀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일로 인하여 전통예술과 관련된 국립기관과 학교들을 깊숙이 들여다 볼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나라 전통예술 정책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