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5
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5
  • 이은주 갤러리 정미소 디렉터
  • 승인 2015.07.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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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장소 특정적 미술이다?
▲ 이은주 갤러리 정미소 디렉터.

미술관 제도를 상징하는 ‘화이트 큐브’를 넘어선 예술은 1960~1970년대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는 개념으로 실시되었다. 이는 곧 물리적으로는 미술관 건물 밖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제도의 틀에 관한 비판일수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공간의 안과 밖을 떠나 특정 장소에서 전시형식으로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한 후,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최근 한국에서 뒤늦게 공간재생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 예술을 생산하고 특정 지역에서 관객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제작, 진행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역할을 대안적 공간과 프로그램을 통해 실행시키기도 했지만, 최근 문화생산의 여러 주체가 오래되고 낡은 공간에 문화예술 활력을 불어넣는 실험적인 행보를 실천하고 있다.

쓰레기 매립지와 같은 사회혐오시설, 기능이 상실된 사회시설을 비롯하여 카페형, 공장형 공간, 재개발을 직전에 둔 주택가와 골목길, 거리 등 다양한 공간이 출현하면서 1960~1970년대 시작된 장소 특정적 미술개념이 적용되기 보다는 특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공간 내부 구조를 해석한 설치작업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의 저자 권미원은 장소 특정적 미술의 맥락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시작한 이 개념이 최근 동시대 미술에서 일어나는 맥락, 논쟁, 관객, 공동체, 프로젝트, 더 나아가 지역성에 대한 화두로 대안적인 방식이 출두했지만 ‘장소’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 했는가에 대한 입장과 더불어 여전히 동시대 미술담론에서 역사적, 이론적 토대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고 밝힌다.

이에 더해 저자는 미술관 제도에 반격을 가하고, 건축법 퍼센티지에 의한 공공미술의 수행으로서 영구 보존되어야 되는 것과, 탈물질화와 이동성의 성질로 인해 시, 공간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되면서 등장한 텔레 프리젠스를 비롯하여 예술가가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전시하고 머무르는 형식의 장소특정성까지 다루었다. 이러한 형식을 빌려 장소 특정적 미술은 물리적 장소에 놓이는 사회적 정치적 산물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2010년 이후에 벌어진 동시대 미술현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공공미술과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있으며, 현재는 인터넷 아트 뿐 아니라, 시 공간을 초월한 영상, 웹 전시가 가능한 시대이다. 작가들은 해외 레지던시를 통해 여러 작품을 물리적으로 낯선 공간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이 뿐 아니라, 해외전시에 참여할 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상황 자체를 공간설치 작업에 적용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현상적 층위의 해석을 떠나 실질적으로 성행하는 ‘장소 특정적’ 개념이 올바르게 적용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래된 장소의 흔적, 전시공간이 아니었던 특수한 공간에서 전시, 공연 성행이 자칫 표면적 실험에 그치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다. 허름한 집과 공장지대는 이미 화이트 큐브가 선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이곳에 어떤 작업을 놓아도 누구에게나 설득력 있는 현대미술이 될 것이다.

이미 장소성에서 오는 압도감과 ‘이런 곳도 전시 혹은 공연장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질문은 이미 예술성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기도 전에 예술성을 인정하는 듯 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실험공간은 회색 시멘트 노출벽이 있어야 하고, 벽지는 뗀 듯 만듯해야 한다는 형식 규정이 작품을 오롯이 관람할 수 있는 방해요소는 아니었을까? 혹은 이러한 오래된 낡음의 흔적과 향수가 작품의 의미 없음을 과대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장소 특정적 미술은 제도적 틀을 비판하거나, 역사 문화적 특징을 비롯해 주변 환경과 상황에 의해 해석되는 방향성을 지녔다. 우리는 요즘 어디까지를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