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은 우리문화의 보석창고 같은 곳
북촌은 우리문화의 보석창고 같은 곳
  • 이은영기자
  • 승인 2008.11.2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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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원 종로구사립박물관협회 초대회장(세계장신구박물관관장) 인터뷰

국내 최초로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한데 묶어 종로박물관협회가 탄생됐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총 184개의 사립박물관이 있다. 그 중 종로에는 22개의 사립박물관이 산재해 있다. 특히 삼청동 가회동 등을 아우르는 북촌지역에 2/3가 운집해 있어 그야말로 이 지역은 ‘문화의 보석창고’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사립박물관은 사실 겉모습의 화려함과 달리 대부분 적자 운영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스스로에게 '내재된 끼'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 종로구사립박물관협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이강원 세계 장신구 박물관장을 만나 박물관의 세계에 빠져 보기로 했다.

-회장 취임을 축하드린다. 지역에서 처음 협회가 생긴 것으로 아는데.

▲종로구사립박물관협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이강원 세계 장신구 박물관 관장

▲외국은 뮤지엄 법이라 해서 미술관 박물관 등을 토털(종합)한 법으로 돼 있다, 우리나라만 유독 박물관 미술관 법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협회)는 미술관 박물관 대학박물관 사립박물관협회 미술관협회가 합쳐져서 박물관협회가 됐다.

세계 어디에도 하나의 지자체 안에 22개의 박물관이 있는 곳은 없다. 종로는 우리나라 문화와 박물관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다. 마침 김충용 청장의 문화 의지가 있었다. 작년에 간담회를 해서 올 5월에 구체적 협의를 거쳐 이번에 발족한 것이다.

종로의 사립박물관 22개 중 2/3가 이 곳 북촌에 있다. 북촌은 6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야생화처럼 피어나 문화의 꽃을 피어왔던 곳이다. 우리나라 문화의 보석창고이자 뮤지엄 타운이다. 이런 곳은 일부러 만들래도 만들 수 없다. 삼청로는 삼청동대로 가회동은 가회동대로 북촌이라는 문화역사적인 '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종로협회가 생겼다는 것은 문화메세지로서 굉장히 클 뿐 아니라 관광 상품으로서 가치도 큰 것이다. 서울시와 구청 쪽의 지원 협조는 물론 우리 스스로 콘텐트를 잘 만들어 가야한다. 이는 종로구의 큰 특권이자 멍에이자 숙제이다. 양면의 칼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통 협회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 구성원들의 권익옹호가 가장 중심에 주어지는데.
▲권익보호라고 하는 것은 후차적인 문제다. 우선 문화에너지를 응집시켜서 문화 패키지 상품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구민을 위한 문화 복지의 한 역할 하고 싶다는 뜻이 있다. 현재 결정된 것은 연 2회 정도 주민증 소지한 구민들에게 무료개방 한다든가, 소외계층과 다문화가정에도 관심을 돌려 교육과 문화향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사실 협의회의 태동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9개 박물관이 모여서 쇳대박물관에서 연합전시회를 열었다. 박물관 스스로 비용을 들여 봉사하고자, 입장료는 1000원으로 진행했다. 그 때 발생한 수익금 460만원 전액을 종로구 복지과에 전달했다. 소외계층을 위해 같이 고민하는 것을 쌍두마차처럼 가고자한다. 건강하게 설 수 있는 기틀마련과 관광 문화자원의 기틀마련, 소외된 문화 복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과 함께 정책개발을 하려고 한다. 그 다음 회원들 권익증진 보호도 있는 것이다.

-사립박물관들의 운영상태는 어떤가?
▲사실 박물관 미술관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수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블박물관 등을 보듯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립박물관은 한 개인이 자기의 모든 것은 모아서 바쳐서 운영하고 있지만 적자가 심각하다. 특히 유지관리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운영난 타개를 위해 국가도 지속적 관심 가져야 할 것이다. (유물을 관리할) 다른 곳도 많이 있지만 제대로 박물관이 수용하지 못하면 흩어지게 된다. 박물관을 통해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교육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선진국이다.

- 개인적으로는 장신구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계기가 궁금하다.
▲내 DNA 속에 어렸을 적부터(장신구를) 밝힌 것 같다(웃음).처음 78년에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양파 몇 개 놓고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한 여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봤다. 너무 아름다워 충격 받았다. 그걸 사고 싶었는데 안 팔아서 못 샀다. 그 일을 계기로 전통장신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박물관을 해야겠다는 흑심(?)을 품고 나름대로 수집을 하고 모으기 시작했다. 돈만 주고 쉽게 산 것이 없다. 어렵게 그 나라 말까지 배워서 물어물어 헤매며 찾아가 수집한 것들이다.

-수집을 위해 그 나라 말까지 배웠나?
▲원래 대사가 말을 배우긴 하는데 오지 등은 영어로 소통을 많이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나라 말을 배워 여행을 가면 내가 그 현지인들의 통역을 도맡았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환영을 받았다. 동양의 조그만 여자가 자기나라 말을 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을 높이 사준 것이다. 그 덕에 일찍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유럽인들 보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내게 먼저 정보를 주고 했다.

-박물관을 이곳, 삼청동에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간동에서 태어났고 외국 있을 때도 한국 들어올 때 마다 삼청동을 꼭 들렀었다. 여기를 들어오면 이집 저집을 보며 박물관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실행은 안됐다. 처음 박물관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 절친한 분들이 많이 말렸다. 잠시 흔들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마음 먹대로 결국실행에 옮겨 지난 2004년에 문을 열었다. 위치도 처음엔 반대했는데 지금은 다들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무척 부러워한다.

-전체 외형은 보석함처럼 보이고 내부도 미로처럼 돼 있는데?
▲건축가인 김성회 교수가 정말 애정을 갖고 잘 지어줬다. 북촌을 머금은 건물을 짓고 싶어 하셨다. 북촌을 담을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이곳은 건축 잡지인 ‘공간’지에 수없이 소개되기도 했다. 미로는 북촌의 골목을 살린 것이다. 박물관 하나를 보고 나가지만 몇 개를 보고 나간 것처럼 욕심을 부려 많이 9개의 전시관을 각각의 테마를 가지고 꾸몄다. 대강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몇 십 년 꿈이었는데 제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 박물관을 가면 이 많은 물건들을 어떻게 보관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친정어머님이 멍에를 지셨고 일부는 내가 가지고 다니고,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다. 우리 외교부는 이삿짐 맡기는 곳이 있다. 아주 실비로, 이삿짐에 맡기기도 하고, 장신구라서 크게 부피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딸 둘인데 애들과 같이 자랐다. 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르기도 하고 같이 쓰다듬기도 하고 그랬다. 우리가 일 세대인데 이 세대 들이 박물관 하겠다는 사람들이 없다. 난 거기에 대한 고민은 안한다. 굉장히 아이들이 아끼고 있다.

-박물관을 설립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기본은 호기심이다. 집중력이 있고. 기자들하고 비슷한, 투쟁을 하는 외로운 문화투사다. 거기에 외골수는 말 할 수는 없다(웃음) 우리는 모이면 그 자리에서 대학교가 설립된다. 버스타고 어디가면 그 자리에서 강의가 이루어진다. 몇 백만 불짜리 강의가 이루어진다. 그런 순간 박물관한 것 한 없이 자랑스러워진다.
그러면서도 순진하다. 얼마 전 우리를 담당하시던 문광부 과장님이 그런 말씀 해주셨다.

-남편인 김승령 전 대사는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지냈다. 박물관 일을 많이 도와주는가?
▲얼마 전 문화고시라고 하는 학예사 시험을 봐서 우리나라 최고령 학예사가 됐다. 공교롭게도 둘째딸과 같이 합격해서 부녀동반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래서 내가 고용을 했다. 무보수로(웃음). 우리 박물관이 학예사가 가장 많다. 남편과 딸 둘, 이제 나까지 하면 네 명의 학예사가 있는 것이다.
큰 딸이 박물관 할 때 박물관학 석사를 했다, 우리 박물관은 동시통역사가 필요 없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서 누구나가 다 외국인들 오면 바로 다 소통된다.

-시인이기도 한데 언제 등단했으며 시집은 몇 권이나?
▲94년도에 스승인 조병화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제목은 ‘외지의 휘파람 소리’로 조병화 선생님이 서언도 써주셨다. 학창시절부터 조선생님이 나보고 글 쓰라고 하셨다. 결혼하고 해외에 다니다 갔더니 더 적극적으로 권유를 해주셨다. 시집 세권 냈고 산문도 좋아한다.

98년에 외교관 부인의 일상을 담은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2년 ‘탱고와 게릴라’는 말년에 남미에 7년 넘게 있으면서 경험한 일들을 쓴 것이다. 남미는 전부 합쳐 10년을 지내 제2의 고향 은 곳이다.

신문칼럼은 2001년부터 간간이 썼는데 어느 날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란에 내 칼럼이 소개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문화면에 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은 오피니언 면에 실렸다. 아무래도 기질(저널리스트)은 속이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대사부인으로 오랜 외국생활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 생활은 어땠나?
▲처음에는 외교관 부인이 뭐하는 여성인지, 파티만 가면 되는 것으로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부딪쳐보면서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 동안 내가 접대한 손님만도 2만5천명이 되더라. 국악원, 국회가면 내가 해드린 밥 드신 분 많다. 그 와중에 가야금도 배우고 살풀이춤도 배웠다. 쿠바까지 가서 낭송회하고, 시도 쓰고 종이에다 붓으로 쓰기도 했다.

알젠틴 국립박물관에서 시집 출판기념회 했다. 대통령까지 왔다. 한지두루마리에 시를 써서 그걸 풀어가면서 낭송했을 때 엄청난 호응이 있었다. 한글의 조형미를 그 때 배웠다. 외교관 부인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외국문화를 접하고 좋은 물건을 많이 접해서 똑똑한 부인들이 많은데 어디로 갔는지 안보여서 안타깝다. 다행이 나는 잠이 없고 얼리버드형인간이라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0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하나하나가 소중하겠지만 특별히 가장 애착 가는 물건이 있는지?
▲에티오피아 십자가도 그렇고 남미의 엘도라도 뗏목도 그렇고 오만의 결혼 목걸이 들어가면 정면에 있는 것 등이다.(일부러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한 것이지) 애착이 안 가는 것이 없다.(웃음)

-박물관을 많이 다니면 좋은 점이 뭘까?
▲여러 가지 삶의 양념이랄까? 박물관을 다니는 토대가 돼서 삶을 즐기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고, 인문학을 하던 뭘 하던 굉장한 바탕이 됐다 한다. 9.11 사태 이후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박물관은 정신적 치료제로 위안도 얻고 편안함도 얻는다.

-박물관을 잘 관람하는 특별한 방법이 혹 있는지 알려달라.
▲가능하면 사전 준비를 많이 하라고 하고 싶다. 요사이는 매체가 좋으니 인터넷을 찾아보고 자기 무장(사전지식구비)을 하고, 메모할 수 있는 도구 가지고 다니는 것 필요하다. 일본이나 외국 사람들 굉장히 메모를 많이 한다. 우리는 최대한 친절히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려한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담아가는 것인데, 슥 보고 간다. 텍스트도 잘 안 읽는다. 관람매너는 말 할 것도 없이 잘 지켜야 한다.

우리박물관에 장신구 숲을 3년간 열어놨었다. 장신구 숲을 걸어보라는 취지에서 개방했는데 흔들고 돌리고 깨뜨리는 등 너무 망가뜨려 놨다. 심지어 키스까지 하는 커플도 있어 관람매너는 그야말로 실종됐다. 특히 그 안에서 숨바꼭질하고 오줌을 싸기도 하고, 애기들 키우는 엄마들 자세는 늘 얘기되는 것처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웠다. 사립박물관은 사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그것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말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약력>
세계 장신구 박물관 관장,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수석부회장, 종로구 박물관협의회 회장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시인이자 수필가.
외교관의 아내로 아프리카 에디오피아를 비롯 미국 자메이카 아르헨티나 등 25년간 세계를 돌며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알리며 살았다.
시집- ‘외지의 휘파람 소리’ 등 다수
산문집-‘세계를 수청드는 여자’,‘탱고와 게릴라' 등

--인터뷰 후기--
빠레!
잠깐이라는 뜻으로 그의 책 '탱고와 게릴라'의 한 대목에서 차용한 라틴어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박물관장과의 대화라기보다 한 전직 외교관과의 대화라고 할 만 했다. 그는 자신의 첫 수필집 제목 ‘세계를 수청 드는 여자’라고 스스로 ‘수청’이라는 낮은 자리의 말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의 부인으로 남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닌 '창조적 내조자'였다. 그 스스로 "외교관과 같은 출퇴근 생활을 했다" 할 정도로 자신의 직분에서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해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뛴 것이다.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한국인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으로 일을 즐기고 사람을 즐겼던 것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수줍어 보이는 듯한 그의 외모와는 달리 내면에는 단단한 불꽃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소년 같은 호기심마저 가진. 그는 열정과 에너지,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여성으로 주어진 삶에서 스스로 인생의 ‘광맥’을 찾은 여성이다.

세상을 다 돌아보고, 그들과 그들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부여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행운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그의 뛰어난 감각과 풍부한 감수성, 열정, 노력이 뒷받침됐겠지만 말이다.

외국생활시절에는 아르헨티나의 붉은악마, 최고의 한식 요리가 등의 칭호를 받았지만 국내에 있었다면 아마 최고의 저널리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스스로 “지금도 호기심 여왕이다. 전쟁터도 나가보고 세상에 부딪쳐보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하는 그는 "도전정신은 신방과 출신이라는 것이 대변해 준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전해준 책 '탱고와 게릴라'는 그날 밤 나의 잠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거침없는 그의 문체는 시적인 듯하면서도 명쾌하다. 외국의 사례를 빗댄 정치 풍자 등은 막힌 속을 확 뚫리게 해 주기에도 충분했다. 그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문화게릴라‘이자 ’저널리스트‘라고 말해주고 싶다.

                   서울문화투데이                   인터뷰 이은영 국장 young@sctoday.co.kr 
                                                          사진 이소영 기자 sly@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