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대균 ‘줄타기’의 유래와 특징
[특별기고]김대균 ‘줄타기’의 유래와 특징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민속사학자
  • 승인 2015.08.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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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그 하나는 대령광대(待令廣大) 계열의 ‘광대 줄타기’요, 다른 하나는 ‘남사당패’ 등 유랑예인(流浪藝人) 계열의 일명 ‘얼음’이라고도 하는 ‘뜬광대 줄타기’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어있는 ‘광대 줄타기’로 그의 예능보유자로 현재 김대균(金大均) 한 사람이 인정되어 있다.

1976년 6월 30일자 처음으로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었던 김영철(金永哲, 1920~1988)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조교였던 김대균이 어렵게 맥을 이어오다가, 2000년 7월 22일 보유자가 되었다.

‘줄타기’의 유래

줄타기는 일명 승도(繩渡), 주색(走索), 색상재(索上才)라 했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하여 오는 민간 연희 중 하나였다. 줄을 다루는 놀이에는 줄다리기(끌기), 그네뛰기와 이 줄타기가 있었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전국적이고도 집단적 놀이이나 ‘줄타기’는 전문적 기교가 전제되는 기예이다. 또한 이 계열의 예능자들을 보면 대개 경기지방 출신이 많은 편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과거 나례도감(儺禮都監)이 위치하였던 지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주로 문헌을 중심으로 그 유래를 찾아본다.

(1) 팔관회(八關會)와 나례(儺禮)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보면, 신라시대 어느 연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국풍으로서 상원(上元) 또는 2월에 행해지는 연등회와 중동(仲冬)인 11월에 행해지는 ‘팔관회’가 있어왔는데, 이 대회는 불교적 행사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국민적 집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신라 말엽의 팔관회는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출하는 행사였고, 이는 그 후 태봉국(泰封國)에 전해진 뒤 고려로 이어졌다고 한다.

궁예(弓裔)의 태봉국은 신라 팔관회의 예전(禮典)을 이어받아 궁중 광장의 중앙에 윤등(輪燈) 일좌(一座)를 차리고, 그 사방에 향등(香燈)을 놓고 좌우 양편에 채백(綵帛)으로써 꾸민 무대 배경을 각각 다섯 길이나 넘게 펼쳐 놓고, 그 옆에서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연출했다고 한다. 
다음 고려에서도 이 양대 행사는 국가 최고의 제전(祭典)으로 갈수록 성대하여 극치에 이르렀었다.

▲김대균 줄타기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의 악희(樂戱)의 주조(主潮)는 종교 중심으로 전승되었고, 그 진행의 궤도적 역할을 한 것이 팔관회였었다.

또한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말에 행한 나례 때에는 공중에서까지 산악잡희(山樂雜戱)를 연행하게 하였다. 산악잡희란 정식 무악(舞樂)이 아닌 구경거리로서의 모든 잡예(雜藝)를 말하는데, 이 산악잡희를 관리하는 곳이 나례도감이었다.

따라서 그 종목과 범위는 다양하였고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간혹 고래(古來)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농환(弄丸), 주색(走索), 번신(飜身), 투정(鬪挺) 등의 지상기예와 씨름, 수벽(手僻) 같은 힘겨루기와 탈놀이, 인형놀이, 사자춤과 같은 무극류(舞劇類)가 대개 나례도감의 산하에 있었다.

이 줄타기는 신라 이후 고려조에 와서 ‘팔관회’나 ‘나례’를 통하여 널리 연희되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종’(제23대, 재위 1213~1259) 32년 4월 8일의 연등회에 대하여, 5월에는 조정 고관을 초대하여 연희하는 기악백희(伎樂百戱) 등에 대하여 운운하였으니, 이는 악공과 재인이 천 수백명에 이르렀다는 말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여기에 호(胡), 한계류(漢係流)의 잡희(雜戱)까지 연출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역대의 국왕이 산악잡희를 좋아하였음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 와서도 고려의 유습이 옮겨져 나례도감에서 산악잡희를 관장하여 ‘나례’와 같이 조정의식(朝廷儀式), 사신 접대에 백희를 놀게 하였고, 조선조 ‘성종’(제9대, 1469~1494) 19년 3월에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즉위를 알리러 온 사신 동월(董越)이, 그가 우리나라에 입국 후 본 견문을 쓴 조선부(朝鮮賦)에서도 서울의 호화스런 놀이의 모습과 줄타기, 사자놀이 등 갖가지 지상기예를 연행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또 그 때에 연희된 잡희들을 보고 조선 성종 때의 성현(成俔, 1439~1505)은 관극시(觀劇詩)에도 줄타기의 현상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즉 ‘…붉은 옷 그림바지 종횡을 어지럽히며, 줄을 밝고 돌아감이 제비가 가볍게 나는 것 같구나…’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줄꾼은 고운 옷차림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겠고, 그 신묘한 줄 재주는 마치 제비가 가볍게 날아 노는 것 같음을 말하고 있다.

근세에서는 광무대(光武臺)를 위시하여 모든 야외 놀이에서도 줄타기가 행하였었다. 송석하(宋錫夏)는 ‘줄타기’에 관하여 그의 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에 설명해 놓았다. ‘색상재(索上才, 줄타기) 조에서 이르기를, 전래하는 놀이의 하나에 줄타기가 있다. 성현이 허백당집(虛伯堂集)에 보색환동비연경(步索還同飛燕京)이라고 한 것이 줄타기를 표현한 것…’ 이라 했다.

대체로 줄타기는 서역계에서 비교적 오래 전부터 유입되어 소위 ‘잡희백기’ 중 하나로 민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하고 기예로웠다.

(2) 화랑유희(花郞遊戱) 관계설
이 설은 보유자들의 구전에 의한 것과 그들이 사사한 고로(古老)들에게서 전하여 진 ‘화랑 유희설’이 있다. 이에 관련된 문헌으로는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 설들에 의하면 신라 국풍에서는 그 당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던 화랑들이 수양 과정으로 도의를 숭상하고 가악을 즐겨하고 무예를 닦았었다고 했다.

또한 지방을 순회하며 명산과 대천을 두루 찾으면서 심신을 수련하였었다. 이와 같이 온 국민의 숭앙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던 화랑들로 신라 말엽에 이르면서는 차츰 해이해지고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고려조가 되면서 화랑제도는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화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이 지녔던 무예인 택견, 땅재주, 줄타기 등을 전파하면서 그로부터는 유랑생활로 바뀌어져 갔다. 무예는 교예로 탈바꿈이 되고, 서민들과 접합하면서 생활수단으로 변하여갔다.

이와 같은 경로로 이들에 의하여 서민 연희로 전파되었는데, 이 연희 역시 본디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심우성 선생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칼럼니스트로서 ▲1954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1960 민속극회 남사당 설립, 대표 ▲1963 국립영화제작소 대한뉴스 아나운서 ▲1966 한국민속극연구소 설립 ▲1970 서라벌예대ㆍ서울예전ㆍ덕성여대ㆍ중앙대ㆍ한양대 등 민속학, 연극사, 인형극 강의 ▲1980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 ▲1985년 아시아1인극협회 창립, 대표 ▲1988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지도위원 ▲1993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고문 ▲1994 민학회 회장 ▲1996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2000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2002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위원장 ▲2003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학연구원 객좌교수를 역임, 현재 한국민속극연구소장이자 문화재청 감정위원을 맡고있다.

197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과  2003년 대통령 보관문화 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저서로는 ▲통일아리랑 ▲무형문화재총람 ▲남사당패연구 ▲한국의 민속극 ▲마당극연희본 ▲민속문화와 민중의식 ▲우리나라 탈 ▲우리나라 인형 ▲민속문화론서설 ▲우리나라 민속놀이 ▲옷본 ▲전통문화를 찾아서 ▲전통문화 길잡이 ▲굿·춤·소리를 찾아서 등이 있다.

또 그는 ▲쌍두아 ▲문 ▲남도 들노래 ▲새야 새야 ▲판문점 별신굿 ▲결혼굿 ▲거창 별신굿 ▲녹두장군 오셨네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4·3의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1인극 작품도 창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