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국악담론]젊은이들에게 주고픈 회상(回想) 2
[김승국의 국악담론]젊은이들에게 주고픈 회상(回想) 2
  •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
  • 승인 2015.08.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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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시인

그 후 나는 내가 근무하고 있었던 학교의 국립화 추진 실무책임이 내게 맡겨졌다. 국립화 추진 업무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무척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었다.

당시 국립화를 반대하는 상대가 있었고 그 저항은 거셌고 끈질겼기에 그 저항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국립화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개발하고 그에 대한 여론 조성이 필요했다.

여론 조성을 위해서는 국립화의 당위성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세미나나 공청회가 가장 효과적이었는데 우호적인 발제와 토론을 해 줄 학계의 교수들을 섭외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국립화를 반대하는 상대가 있어 우호적인 패널로 참석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교육인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의 고위직 공무원부터 실무 담당 공무원들을 위 아래로 접촉하면서 일일이 국립화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촉구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국회를 드나들며 관련 상임위 국회의원들과 보좌진들에게 국립화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법제화를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그 또한 험난한 일이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국립화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내게 국립화 추진 성공의 공로에 대한 응분의 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학교 국립화를 위하여 헌신했는데 내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울분감 속에 지냈다.

당시 비록 학교로부터 상을 받지 못했지만 국립화를 추진하면서 나는 뜻밖에도 너무나도 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 깨달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립화를 추진하면서 여러 부처의 공무원들, 국회의원들과 보좌진들, 그리고 학계 교수들과 진정성 있는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견고한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아울러 정부의 행정체제와 법제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돈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기회이고 축복일 수 있다는 교훈을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젊은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나는 학교를 나와 바로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연구소는 정부와 지자체의 문화예술진흥 정책 용역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주 업무였는데 내가 학교 국립화를 추진하면서 인연이 된 수많은 대학교수, 공무원, 국회의원 및 비서진 등 인적 네트워크와 정부의 전통예술진흥정책 수립 실무를 맡으면서 쌓인 전문적 시각이 연구소 출범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많은 일들이 연구소에 맡겨졌는데 일을 처리해가면서 문화정책 에 대한 전문성도 더욱 신장되었다.

연구소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8년, 경기도 문화재위원으로 2년, 서울시 문화재위원으로 6년, 이북5도 문화재위원으로 6년을 거치면서, 수많은 무형문화재 예능종목의 발굴, 연구, 조사 및 예능종목의 지정과 예능보유자 인정에 관한 일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전통예술 전문가로서의 나의 전문성을 구축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또한 10여 년 전에 나는 부천무형문화엑스포 정책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축제 전문가로서 첫 출발을 하였다. 그 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07년 ‘대한민국전통연희축제’의 원년 산파역과 기획을 맡아 축제 전문가로서의 경륜을 더했다.

3년 전에는 서울시 노원구의 ‘노원탈축제’의 초대 추진위원장을 맡아 축제의 기획 및 실행을 주도하였고, 축제란 대동(大同), 동락(同樂), 상생(相生)의 우리 전통축제의 기본 정신 아래 구민이 주인이 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 맞아 떨어져 20만 명 이상의 노원구민이 스스로 탈을 만들어 쓰고 나와 자발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등 ‘노원탈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창출하고 실행하였던 ‘노원탈축제’의 성공으로 정상급 축제 전문가 대열에 설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축제전문가들의 모임인 한국축제포럼의 고문을 맡고 있다.

나는 내가 설립한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를 본궤도에 올려놓을 쯤, 노원구로부터 노원문화예술회관장직 제안이 들어왔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었기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나를 믿고 관장직을 제안해준 구청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관장직을 수행하여 노원구 문화발전에 기여하여 보답하리라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연구소장 직을 사직한 후 3년간의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직이 시작되었다. 노원문화예술회관장으로 취임 직후 지역 문예회관은 지역 문화예술의 거점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 첫걸음을 구민들의 니즈에 부응하는 프로그램, 지역 문화예술인들과의 협업 프로그램, 지역 문화공간과의 네트워크 프로그램 개발에 집중하였다.

그러한 일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후 문예회관과 교육기관과의 네트워크 구축과 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학교수업의 현장을 문예회관으로 옮겨 놓은 협업 프로그램인 ‘교과서예술여행’을 기획하여 시행하였다.

‘교과서예술여행’은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매년 1만여 명의 관내 초등학생들이 1년에 4번 학교 정규수업 시간에 노원문화예술회관으로 학습공간을 옮겨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사례가 서울시 타구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원문화예술회관장 직을 수행하던 중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직을 맡아 해 볼 의사가 있는지 제안이 들어왔다.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직 임기는 많이 남아 있었고 제안이 들어 온 곳의 근무 환경이 더 나은 것이 없어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국가를 위해 한 번은 일해봐야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고 내 나이로 보아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쾌히 수락을 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문화예술전문가로서 나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앞으로도 쉼 없이 부단하게 견문을 넓히고,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현장의 경험을 쌓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가급적 내가 무엇을 맡고, 내가 무엇을 하기 보다는 나의 지식과 경험을 후배들과 젊은이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의 적극적인 조언자 혹은 조력자로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르반데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극화한 뮤지컬 '라만차의 사나이(Man Of La Mancha)에 나오는 노래 'The Impossible Dream'을 좋아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모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돈키호테의 미련스러운 그 희망의 꿈이 너무도 좋다. 아마도 내 인생이 그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사 전문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The Impossible Dream (이룰 수 없는 꿈)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bear with unbearable sorrow
To run where the brave dare not go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견디기 힘든 슬픔을 견디며
용사도 감히 가지 못하는 곳으로 나아가노라 

To right the unrightable wrong
To love pure and chaste from afar
To try when your arms are too weary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걷잡을 수 없는 악을 바로 잡고
멀리로부터 순결한 사랑을 품고
너무 지쳐있을 때도 시도해 보고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팔을 뻗치노라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ie peaceful and calm
when I am laid to my rest

아무리 희망이 없어도 아무리 멀어도
그 별을 좇는 것이 나의 사명이오.
의문과 주저 없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하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옥에라도 나아가리.
나, 이 영광스러운 사명에 충실하면
영면하는 날, 내 마음은 평화와 고요 속에 있으리라

And the world will be better for this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조소를 당하고 상처투성이가 된 한 사나이의 덕택으로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이 되리
그래도 마지막 한 방울의 용기를 다해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닿을 수 없는 별에 닿으려고 
투쟁하는 이 사나이의 덕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