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임성남의 창작발레-춘향의 사랑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임성남의 창작발레-춘향의 사랑
  •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
  • 승인 2015.08.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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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연낙재가 주최하는 행사에 갔다가 풍물 명인 정인삼씨를 만나 임성남선생에 관한 일화를 들었다.

무용 장르 중에서 발레가 가장 뒤쳐진다고 질타하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던 임성남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무용중에 발레가 제일 잘 나가고 있기에, 섣부르게 말한 것이 후회가 된다는 말씀이다.

7월 초 볼쇼이극장에서 <맑은 시냇물(Bright stream)>이라는 소비에트 시절의 발레를 보게 되었다. 19세기 발레가 주를 이루는 레파토리에서 생소한 작품제목을 보고 더욱 반가웠다.

최초 안무는 발레 심포니의 창시자로 알려진 로뿌호프, 작곡은 그 유명한 쇼스타코비치. 게다가 초연시 주역은 나의 대학원 논문주제였던 교수법의 대가 아사프 메세레르. 1935년에 만들어진 <맑은 시냇물>은 집단농장 칼호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잘 배치하여 즐겁고 행복한 무드를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유쾌하면서도 화려한 작품이었다.

   
▲볼쇼이발레단, 맑은 시냇물, 프로그램(2015) 표지

스탈린 통치시절에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희노애락을 똑같이 느끼며 살았구나하는 의외의 느낌을 가지며 감상했다. <맑은 시냇물>을 보는 관객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러시아의 색채가 분명한 이 작품은 오래 전 <페트루쉬카>나 <불새><곱사등이 망아지>등에서 느꼈던 러시아민속의 화려한 색채와 음률 그러면서도 그 안의 연약한 인간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한 정서의 현대판 변용이었다.

임성남의 작품들이 떠오른 것은 <맑은 시냇물>을 보는 중이었다. 러시아 그것도 소비에트발레를 보면서 우리의 정서와 가락이 살아있던 임성남의 발레작품들을 다시금 보고 싶다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래전 늘 외국의 발레를 선망하며 유럽에 나가고 싶어 하던 내게, 그는 “아직도 발레를 몰라요?” 라며 극구 발레단 떠나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 만류를 뿌리치고 2년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발레단으로 복귀했을 때, 마침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1990)가 이루어져 러시아 무용가들과 직접 교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러 수교가 더 일찍 이루어졌더라면 우리 발레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1917) 이후 일본에 러시아 무용가들이 정착해 가르친 일본 발레계에 비해 우리는 광복 직후 일본유학을 한 한동인, 정지수 등에 의해 서구 발레를 받아들였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국립발레단, 춘향의 사랑(1986) -피날레장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직업발레단은 한동인의 서울발레단으로1946년에 창단되었다. 그마저도 6.25 이후 월북, 납북 등으로 대부분의 무용가들이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일본 유학을 한 임성남이 등장했다. 1972년 국립무용단에서 국립발레단으로 독립한 뒤 단장으로 취임한 임성남에 의해 한국발레의 큰 틀을 만드는 작업이 뒤늦게 이루어졌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86년, 국립발레단은 춘향전을 발레로 만들어 공연을 했다. 제목은 <춘향의 사랑>. 대본 안무는 임성남, 음악은 김희조. 내가 춘향이었고, 이도령은 문병남, 월매 김학자, 변사또 김성일, 향단 박경숙 등이었다. 임성남은 한국소재의 발레작품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고전발레에 쏠려 있었다.

   
▲국립발레단, 춘향의 사랑(1986)-관헌 장면

임성남은 당시 단원들에게 봉산탈춤을 배우고, 역사 및 미학강의도 듣게 했다. 우리의 장단과 춤사위를 모르고는 창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받쳐주는 축적된 시스템과 단원들의 의식과 실력이 따라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한국적인 창작발레가 필요하다는 말만 무성할 뿐 제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지난 봄 조택원선생 추모공연에서 그의 유작인 춘향전과 솔로인 방자춤 재연을 보았다. 멋과 위트와 해학이 듬뿍 담긴 건강하고 탄력 넘치는 춤에 감탄을 했다. 우리는 그간 잊고 있었다. 우리의 호흡과 아취를, 우리의 장단과 춤사위를 모르고 어찌 춘향전을 현대의 발레로 불러 올 것인가를.

발레는 아름다운 형태만을 만드는 예술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려내는 희로애락은 물론 꿈을 보여주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