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구림 화백]영국 테이트 모던 초대받은,여전히 젊은 작가 김구림
[인터뷰-김구림 화백]영국 테이트 모던 초대받은,여전히 젊은 작가 김구림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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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릴 3000 페스티벌’ 백남준 서도호 등 세계주목작가들과 함께 초대 받아, 제2의 전성기 구가

"작품을 생각하는 가운데 ‘생활의 작품화’ 이루어져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예술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구림, 불과 넉 달만 있으면 여든이 되는 노장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우리나라 예술인이 이룩하지 못한 초청을 받았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스타오디토리움 극장에서 오는 18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24분의 일초의 의미’가 상영될 예정이다.

▲80의 나이에도 여전히 젊은 감각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김구림 화백.

그뿐만이 아니다. 다음 달 프랑스 릴에서 열릴 예정인 ‘릴 3000 페스티벌’에도 김구림 작가는 초대받았다. 릴 페스티벌에는 백남준, 서도호 등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과 함께 한다.김구림은 영화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 작가로 일찍이 ‘AG그룹’과 ‘제4집단’을 통해 아방가르드, 전위예술이 무엇인가를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전위예술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 영국 테이트모던 스타오디토리움 극장에 18일부터 사흘 동안 ‘24분의 일초의 의미’가 상영될 예정이다. 1969년 당시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어떻게 제작했는가.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만들기 전에 ‘문명, 돈, 여자’라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방 안에서 여자가 홀로 24시간을 지내는 장면을 묘사한 영화다. 문제가 생겼다. 출연료가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촬영 다음날 여배우가 나오지 않았다. 당시는 가정집에 전화가 없고 큰 회사에서나 전화가 있던 때였다. 전화가 여의치 않으니 여배우를 찾을 길이 없어서 ‘문명, 돈, 여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 김구림, '음과 양 12-S'

그 뒤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만들 때에는 ‘제 4집단’의 회원을 배우로 기용했다. 제 4집단 멤버를 배우로 쓰면 출연료로 문제 생길 일도 없었다. 영화는 1초에 필름 24컷이 필요하다. 1초 동안 넘어가는 필름 24컷이라는 의미가 ‘24분의 일초의 의미’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 당시에는 전위적인 영화라 ‘이게 무슨 영화냐’고 촬영기사가 중간에 그만 둔 적도 있었다.

당시 이 영화가 전위영화, 실험영화라고 해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충무로 영화인도 아닌 내가 만든 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니 충무로 영화계가 ‘김구림이 영화계를 망친다’고 생각해서 발칵 뒤집혔다. 당시 나는 영화인이 이니었다. 유영산업이란 곳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만든 거다.

▲ 김구림, '음과 양 11-05.70'

영화는 편집이 중요하다. 편집실에 가서 편집하려고 하니 편집실 사장이 벌벌 떨며 못하겠다고 하더라. ‘왜 못하겠느냐?’고 물어보니 ‘영화계에서 당신을 노리고 있다. 편집을 해주었다가는 영화계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며 편집을 거절했다. 영화를 만들긴 만들어야겠는데 방법이 없어서 편집하는 방법을 배워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직접 편집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충무로에 차를 마시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어 구둣발로 나를 짓밟기 시작했다. 당시 충무로 영화계 사람들은 주먹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네가 전위예술을 해?’ ‘네가 영화계를 망치려고 들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영화계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일주일 동안 입원했을 정도로 폭행당했다.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만들고 나니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돈이 없다 보니 음악도 집어넣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충무로의 반대가 심해서 영화를 제대로 발표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테이트모던 측에서 작년에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소장하게 됐다. 2013년 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이 있을 때 이 영화를 공개했다.

당시 테이트모던 측에서 ‘24분의 일초의 의미’를 보고는 ‘한국에 이런 작가도 있나?’ 하고 깜짝 놀랐다. 테이트모던은 작품이 만들어진 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 영화들을 모두 살펴보아도 전위예술 영화는 내 작품보다 연도가 늦다. 그래서 테이트모던에 내 작품이 초청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전위예술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기상조였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빨리 태어나서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닌가.
“맞다.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내 작품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거다. 그런데 앞서가지 않았으면 테이트모던에 초청되는 식으로 세계무대에 내 작품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갈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김구림 화백.

-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정신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당시가 1960년대다. 나는 미술대학을 다니다 자퇴하고 독학했다. 당시는 물감도 변변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도 없던 시절이었다.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에 가니 웬 잡지가 바닥에 있는 걸 발견했다. 호기심에 잡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표지를 보니 ‘라이프’였다. 당시에는 ‘라이프’와 ‘타임’지만 미술과 음악, 영화, 무용 관련 기사를 다뤘다.

이런 책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서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수입도 안 되고 미군부대에서 버린 걸 주워온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점 주인에게 ‘앞으로 제가 몽땅 살 테니 구해만 달라’고 부탁했다. ‘라이프’와 ‘타임’을 바탕으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 무용수가 고압선 주위를 빙빙 도는 게 무용이라고 하고, 오선지 하나 없이 긁는 것만으로도 음악이라고 하니 문화적 충격이 컸다. 영어사전을 끼고 정독하며 배웠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이론과 예술가의 이름을 모조리 터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제4집단’처럼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내 주위에 모일 수 있었다.”

- 사실 그동안 작품성에 비해 저평가된 작가로 미술계에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재작년 열린 시립미술관 전시를 통해 재조명되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 같다.
“전람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 몇 십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외국 작가를 포함해 어떤 작가의 개인전이 좋았는가를 묻는 설문조사였다. 당시 설문조사에서 내가 1위로 뽑혔다. 김달진미술자료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고인과 생존 작가를 비롯해 영향력 있는 작가가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내가 2위를 차지했다.

▲ 김구림, '음과 양 8-S'

미국에서는 내 작품 세계를 존중해주고 미술관에서 전람회를 열어주었다. 문예진흥원의 초청으로 미국 생활 십 년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는 화랑에서조차 홀대했다. 김구림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건 아는데 화단에서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도리어 짓밟으려고 했다. 한국에서 학맥과 인맥이 없으니 무시를 당했지만 외국에서는 내 작품 세계를 존중해주니 한국도 어쩔 수 없이 나를 재조명하기에 이른 거다.”

-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 전시를 위한 사인까지 받고는 일방적으로 홀대하지 않았나.
“작품 당 인증번호까지 허가하고서도 나를 짓밟은 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 전람회를 보라. 과천을 가보면 내 작품은 한쪽 구석에 한 작품만 걸어놓았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돌아온 답변이 ‘우리 소장품만 가지고 전시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광복 70주년 기념 한국근대미술 소장품전’이 열렸다. 원래는 제 작품 6점이 전시되기로 되어 있다가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저는 ‘핍박’을 받고 있다. 20대부터 당해온 홀대라 홀대에는 무감각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재작년 정형민 관장 재직 시 김구림 화백의 작품을 소장키로하고 김 화백고 최종합의 사인을 하고 작품선정과 인증번호까지 매겨놓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작품 소장을 취소했다. 김 화백은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제대로된 해명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

▲ 김구림, '음과 양'

- 김구림이라는 작가 이름을 빼고 작품을 만든 작가의 나이대가 몇 살로 보이느냐고 일반 관람객에게 물어본다면 열의 아홉은 ‘이십 대 혹은 삼십 대 작가의 작품이 아니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올 정도로 작품이 지금도 여전히 젊은 경향을 띠고 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새로운 걸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한국 미술계는 이런 나를 ‘정체성이 없는 작가’로 치부하고 만다. 그래서 내 작품이 외국에서 우대받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안 팔린다. 심지어는 김구림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관람객이 있어도 어떤 콜렉터는 ‘김구림 작가 작품은 사지 말라’, ‘정체성이 없는 작가 작품을 사서 뭐 하시게요?’ 하기까지 한다.

정체성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평생 물방울만 그린다고 치자. 그러면 그게 정체성이 있는 작가란 이야기인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그런데 우리나라 미술계는 이런 작가에게만 대단한 작가 정신이 있는 것 마냥 추켜세운다. 똑같은 걸 만든다는 건 지겨운 일이다. ‘왜 똑같은 걸 만드나’ 하고 의아해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같은 콘셉트로 일관화한다.

하지만 내 작품 세계는 그렇지 않다. 세월이 발전하면서 라디오에서 흑백 TV, 컬러 TV를 거쳐 지금처럼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하는 것처럼 내 작품 세계 역시 세상이 바뀌는 것과 궤를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변해왔다. 사회가 변하면 작품도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시대에 맞게 나오더라. ‘이렇게 변해야겠다’ 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 그러면 요즘은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갖는가.
“기계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다. 요즘은 컴퓨터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운전을 해도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인간이 기계에만 의존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이 기계에 의존하게 된다. 나중에는 기계의 종속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전시 ‘그냥 지금 하자’ 가운데 ‘문명인을 위한 애도’에서 전시장을 커다란 무덤처럼 만든 건 길을 잃은 네비게이션을 표상한다.”

-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어떤 소신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언제나 작품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생활의 작품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작품을 하다 보면 작품을 많이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다 작품의 생활화가 체득되지 않으면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작품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저절로 작품이 구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일 년에 300점의 작품을 완성하는 ‘다작’ 작가로도 유명하다.
“예전에는 그랬다. 요즘은 그렇게 많이 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작가는 일 년에 10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야 작가 소리를 듣는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2~3년 전부터는 일 년에 겨우 100점을 간신히 만든다. 체력이 따라오지 못한다.”

- 그래도 사흘에 한 점 작품을 만드는 거라면 사생활이 없지 않은가.
“추석이나 설, 빨간 날이라는 개념이 없다. 언제든지 작품이 생각나면 달라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