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러브’ 대체품이 진짜보다 좋은 역설
[칼럼] ‘러브’ 대체품이 진짜보다 좋은 역설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2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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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스의 세계관을 유린하는 대체 팔루스, 혹은 시뮬라크르

극의 1/4이 흐르기 전까지만 해도 ‘러브’는 엄연히 ‘아마조네스’의 세상이다. 외로운 두 영혼, 타냐와 애니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고서는 우정을 넘어서서 동성애의 경계까지 오가는 지점으로만 본다면, 타냐와 애니의 왕국 안에서는 팔루스가 없더라도 타냐가 대리 팔루스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엄밀하게 언급하면 애니를 만족하게 만드는 팔루스의 조력자로서 타냐는 애니에게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파트너다.

▲ '러브'에서 타냐를 연기하는 김소진과 애니를 연기하는 용혜련 (사진제공=북새통)

하지만 팔루스가 없어도 될 법한 타냐와 애니의 아마조네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두 여성의 우정에 금이 가서 발생하는 균열이 아니다. 진짜 팔루스, 쉽게 이야기해 진짜 남자가 이 두 여자 안에 끼어들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로렌조, 약에 취하지 않고서는 생을 영위할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약쟁이 로렌조에게 애니가 반하면서 사단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로렌조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애니에게는 타냐라는 대리 팔루스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타냐는 엄연히 팔루스의 대리 기능이었지 진짜 팔루스가 아니었다. 진짜 팔루스를 가진 남자를 만나면서 애니는 대리 팔루스, 팔루스를 흉내내는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타냐보다는 진짜 팔루스의 매력을 체험하고는 대리 팔루스인 타냐보다 로렌조에게 기대기 시작한다. 타냐와 애니라는 아마조네스는 이렇게 무너지는 듯했다.

▲ '러브'에서 타냐를 연기하는 김소진과 애니를 연기하는 용혜련 (사진제공=북새통)

하지만 로렌조는 애니가 평생을 기대기에는 형편없는 남자였다. 애니는 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한 특별한 기술이 없다.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가련한 여성이다. 애니가 몸이 아프면 남자를 만날 수 없어지고, 그러면 당장 로렌조와 애니의 생계가 곤란해진다.

애니가 몸이 아프면 로렌조는 남편으로서 아픈 애니를 대신하여 생계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로렌조는 그렇지 못하다. 몸이 좋지 않은 애니의 아픈 육체는 고려하지 않은 채 남자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구타까지 한다. 진짜 팔루스에게 그녀의 모든 생을 의지하고자 했던 아내였던 애니는 이렇게 진짜 팔루스에게 괄시를 받고 고난을 당한다.

▲ '러브'에서 타냐를 연기하는 김소진과 애니를 연기하는 용혜련 (사진제공=북새통)

하지만 대리 팔루스인 타냐는 다르다. 애니를 구타하는 로렌조를 떼어놓고 물리적인 구타를 가하려고까지 할 정도로 애니를 보살피려 한다. 팔루스를 흉내내는 대리 팔루스에 불과하지만, 진짜 팔루스가 챙기지 못하는 여자의 심정을 타냐라는 대리 팔루스는 돌보고 헤아릴 줄 안다.

로렌조에게 얻어맞은 애니를 구하고 로렌조를 구타하려고 한 타냐의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았던 타냐와 애니라는 아마조네스가 다시금 봉합을 맞을 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애니에게 있어 물리적인 팔루스는 소용이 없었다. 비록 대리 팔루스라 해도 같은 여자로서 여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던 타냐라는 대리 팔루스가 중요했던 것임을 애니는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대리 팔루스가 진짜 팔루스보다 좋다는, 혹은 시뮬라크르가 진짜보다 좋다는 역설을 연극 ‘러브’ 안에서 읽어볼 수 있다.

'러브'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9월 26일까지 관객을 맞이한다. 관람료는 3만원. 15세 이상 관람 가능하다.

평일 8시/ 토요일 3시,7시/ 일요일 4시 (화요일 공연 없음) 문의처: 02-742-7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