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서부전선’ ‘웰컴 투 동막골’보다 진화하지 못한 코미디
[영화칼럼] ‘서부전선’ ‘웰컴 투 동막골’보다 진화하지 못한 코미디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24 09: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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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이 아쉬운 코미디

남과 북의 두 졸병, 남복(설경구 분)과 영광(여진구 분)은 두 가지를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 남복은 영어로 된 비밀문서를, 영광은 낡은 북한 탱크를 지키지 못하면 총살형을 당하는 신세라는 점에서 쌍생아처럼 닮았다.

▲ ‘서부전선’의 한 장면

남과 북의 군인이라는 점에서 만나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제압해야 하지만 남복은 영광에게 총을 겨누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국군이 잃어버린 비밀문서가 북한군 영광의 손에 있는 고로, 영광이 비밀문서를 어디에 숨겼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코미디를 유발하기 위해 남복은 바로 눈앞에 있는 비밀문서를 두고도 영광에게 비밀문서를 어디에 숨겼느냐고 윽박지르기 바쁘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상황을 유발하기 위해서다.

남복과 영광이 비밀문서와 탱크를 지키지 못하면 사형을 당한다는 점에서 쌍생아인 것처럼, ‘서부전선’은 ‘웰컴 투 동막골’과 쌍생아처럼 엇비슷한 골격을 갖는 영화다. 서로 대치하던 남과 북의 군인이 정서적인 교류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는 가운데서 이념의 대립을 극복하고 인간애를 쌓는다는 점에 있어서 ‘서부전선’은 ‘웰컴 투 동막골’뿐만 아니라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닮은 모양새를 갖는다.

하지만 닮은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해서 ‘서부전선’이 ‘웰컴 투 동막골’보다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웰컴 투 동막골’이 언제 만들어진 영화인가, 십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십 년 전에 나온 영화보다는 북한을 바라보는 자세나 영화적인 태도에 있어 ‘웰컴 투 동막골’보다 진일보하거나 다른 시선으로 북한군 영광을 바라보는 게 옳겠지만, 불행히도 ‘서부전선’은 십 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 ‘서부전선’의 한 장면

도리어 영광은 연합군 혹은 국군의 폭격에 형들이 희생당한 사연을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38선을 넘은 역사의 가해자인 북한을 ‘피해자’로 보일 법하게 묘사한다. 일본이 과거 미국에게 원자폭탄 투하를 당한 것을 두고 대동아공영이라는 기치 아래 일본의 전쟁 야욕이 미국의 원폭 투하를 불러오게 한 인과관계는 도외시한 채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라고 코스프레를 해대는 시추에이션과, 남한을 침범한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 행세를 하는 영광의 사연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불편하기만 하다.

목함 지뢰로 우리 장병을 다치게 만들고, 천안함 침몰의 가해자인 우리가 살고 있는 북한과, 영화 속 북한군 영광을 온정주의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의 노스탤지어적 태도는 영화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가운데의 북한과 정서적인 괴리감을 초래하기에 충분하다.

추석 개봉을 염두에 두고 온 가족이 보는 영화라면 비밀문서의 줄임말인 ‘비문’을 어르신 관객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걸 염두에 두고 제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비문이라는 준말은 십대, 이십대 관객이라면 얼른 알아듣겠지만 시니어 관객은 우리말이면서도 무슨 단어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 ‘서부전선’의 한 장면

영화 초반에 남복이 쏠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영광을 쏠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건만, 남복의 총알은 신기하게도 영광만 쏙쏙 피해서 날아간다. 영광이 탄 탱크의 기동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탱크의 캐터필러에 남복이 수류탄을 던졌어야 옳건만 남복은 엄한 총질만 탱크에 해댄다.

남복이 왜 비밀문서를 목숨처럼 소중히 다뤘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영화에서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처리한 점도 이 영화의 개연성을 납득하기 어렵게 만든다. 추석을 목전에 둔 영화라 해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 있어 아쉬움이 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