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대균 ‘줄타기’의 유래와 특징-Ⅱ
[특별기고]김대균 ‘줄타기’의 유래와 특징-Ⅱ
  • 심우성 민속사학자/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5.09.27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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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심우성 민속사학자/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근세에서는 광무대(光武臺)를 위시하여 모든 야외 놀이에서도 줄타기가 행하였었다. 송석하(宋錫夏)는 ‘줄타기’에 관하여 그의 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에 설명해 놓았다.

‘색상재(索上才, 줄타기) 조에서 이르기를, 전래하는 놀이의 하나에 줄타기가 있다. 성현이 허백당집(虛伯堂集)에 보색환동비연경(步索還同飛燕京)이라고 한 것이 줄타기를 표현한 것…’ 이라 했다.

대체로 줄타기는 서역계에서 비교적 오래 전부터 유입되어 소위 ‘잡희백기’ 중 하나로 민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하고 기예로웠다.

(2) 화랑유희(花郞遊戱) 관계설  

이 설은 보유자들의 구전에 의한 것과 그들이 사사한 고로(古老)들에게서 전하여 진 ‘화랑 유희설’이 있다. 이에 관련된 문헌으로는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 설들에 의하면 신라 국풍에서는 그 당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던 화랑들이 수양 과정으로 도의를 숭상하고 가악을 즐겨하고 무예를 닦았었다고 했다. 또한 지방을 순회하며 명산과 대천을 두루 찾으면서 심신을 수련하였었다.

이와 같이 온 국민의 숭앙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던 화랑들로 신라 말엽에 이르면서는 차츰 해이해지고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고려조가 되면서 화랑제도는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화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이 지녔던 무예인 택견, 땅재주, 줄타기 등을 전파하면서 그로부터는 유랑생활로 바뀌어져 갔다. 무예는 교예로 탈바꿈이 되고, 서민들과 접합하면서 생활수단으로 변하여갔다.

이와 같은 경로로 이들에 의하여 서민 연희로 전파되었는데, 이 연희 역시 본디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줄타기’의 특징

▲김영철 선생님과 함께한 어릴적 김대균님

줄타기의 보유자 김대균은 판줄의 교예(巧藝)에 빼어났던, 고 김영철의 ‘잔노릇’ 43가지를 장시일에 걸쳐 이어받은 후, 고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옹으로부터 재담과 소리를 배움으로써 교예와 재담, 소리를 섭렵한 줄꾼이다. 김대균 줄타기의 특징은 먼저 ‘판줄’이라는데 있다.

판줄이라 하는 것은 재담과 소리를 곁들여 어릿광대와 함께 극적으로 진행하며 전 바탕을 보여주는 것으로 반주를 맡는 ‘삼현육각’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뜬광대 줄타기’의 반주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날라리가 맡는데 ‘광대 줄타기’는 ‘삼현육각’을 갖추어 염불, 타령, 당악 등이 연주된다. 짧은 시간에 몇 가지 재미있는 ‘잣노릇’만 보여주는 ‘도막줄’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국의 줄타기가 아슬아슬한 재주에만 치중한다면 우리들의 전통적인 줄타기는 ‘악’, ‘가’, ‘무’를 곁들이 교예로서 특히 연극성이 우세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1) 김영철 님의 구술에 따른  ‘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1975)의 줄 구조 다음 줄타기의 승도보는 『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제118호 김천홍, 정화영의 『줄타기(繩度)』(문화재관리국, 1975)의김영철 본을 참고, 정리한 것이다.

2) 김영철 님의 승도보
(1) 고전줄타기 | 장단 ; 염불 일박(一拍) 일보(一步)로 양 손을 좌우로 펴들고 줄을 타며 건너 간다.
(2) 뒤로 걸어가기 | 장단 ; 당악 줄 위에서 뒷걸음질을 하며 일박, 일보로 줄 끝까지 걸어간다.
(3) 앞,뒤로 종종 걸음 자진타령에 맞춰 (1)과 같이 자진걸음으로 건너간다.
(4) 서서 돌아서기 | 장단 ; 타령 작수목 앞에 와서 두 발 걸어가서 바른손의 부채를 가슴 앞으로 돌리며 180도 돌아선다.

 

(5) 앉아서 좌로 돌기 ①과 같이 줄 중앙 지점에 앉아서 ②와 같이 바른발을 앞으로 조금 대딛고 부채를 홱 앞에서 우로 돌려 치면서 ③과 같이 180도 돌아앉았다가 우로 180도 돌아앉는다.

 

(다음 호에 계속)

 

심우성 선생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칼럼니스트로서 ▲1954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1960 민속극회 남사당 설립, 대표 ▲1963 국립영화제작소 대한뉴스 아나운서 ▲1966 한국민속극연구소 설립 ▲1970 서라벌예대ㆍ서울예전ㆍ덕성여대ㆍ중앙대ㆍ한양대 등 민속학, 연극사, 인형극 강의 ▲1980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 ▲1985년 아시아1인극협회 창립, 대표 ▲1988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지도위원 ▲1993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고문 ▲1994 민학회 회장 ▲1996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2000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2002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위원장 ▲2003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학연구원 객좌교수를 역임, 현재 한국민속극연구소장이자 문화재청 감정위원을 맡고있다.

197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과  2003년 대통령 보관문화 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저서로는 ▲통일아리랑 ▲무형문화재총람 ▲남사당패연구 ▲한국의 민속극 ▲마당극연희본 ▲민속문화와 민중의식 ▲우리나라 탈 ▲우리나라 인형 ▲민속문화론서설 ▲우리나라 민속놀이 ▲옷본 ▲전통문화를 찾아서 ▲전통문화 길잡이 ▲굿·춤·소리를 찾아서 등이 있다.

또 그는 ▲쌍두아 ▲문 ▲남도 들노래 ▲새야 새야 ▲판문점 별신굿 ▲결혼굿 ▲거창 별신굿 ▲녹두장군 오셨네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4·3의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1인극 작품도 창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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