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근세에서는 광무대(光武臺)를 위시하여 모든 야외 놀이에서도 줄타기가 행하였었다. 송석하(宋錫夏)는 ‘줄타기’에 관하여 그의 한국민속고(韓國民俗考)에 설명해 놓았다.
‘색상재(索上才, 줄타기) 조에서 이르기를, 전래하는 놀이의 하나에 줄타기가 있다. 성현이 허백당집(虛伯堂集)에 보색환동비연경(步索還同飛燕京)이라고 한 것이 줄타기를 표현한 것…’ 이라 했다.
대체로 줄타기는 서역계에서 비교적 오래 전부터 유입되어 소위 ‘잡희백기’ 중 하나로 민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하고 기예로웠다.
(2) 화랑유희(花郞遊戱) 관계설
이 설은 보유자들의 구전에 의한 것과 그들이 사사한 고로(古老)들에게서 전하여 진 ‘화랑 유희설’이 있다. 이에 관련된 문헌으로는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 설들에 의하면 신라 국풍에서는 그 당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던 화랑들이 수양 과정으로 도의를 숭상하고 가악을 즐겨하고 무예를 닦았었다고 했다. 또한 지방을 순회하며 명산과 대천을 두루 찾으면서 심신을 수련하였었다.
이와 같이 온 국민의 숭앙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던 화랑들로 신라 말엽에 이르면서는 차츰 해이해지고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고려조가 되면서 화랑제도는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화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이 지녔던 무예인 택견, 땅재주, 줄타기 등을 전파하면서 그로부터는 유랑생활로 바뀌어져 갔다. 무예는 교예로 탈바꿈이 되고, 서민들과 접합하면서 생활수단으로 변하여갔다.
이와 같은 경로로 이들에 의하여 서민 연희로 전파되었는데, 이 연희 역시 본디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줄타기’의 특징
줄타기의 보유자 김대균은 판줄의 교예(巧藝)에 빼어났던, 고 김영철의 ‘잔노릇’ 43가지를 장시일에 걸쳐 이어받은 후, 고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옹으로부터 재담과 소리를 배움으로써 교예와 재담, 소리를 섭렵한 줄꾼이다. 김대균 줄타기의 특징은 먼저 ‘판줄’이라는데 있다.
판줄이라 하는 것은 재담과 소리를 곁들여 어릿광대와 함께 극적으로 진행하며 전 바탕을 보여주는 것으로 반주를 맡는 ‘삼현육각’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뜬광대 줄타기’의 반주는 꽹과리, 징, 북, 장고, 날라리가 맡는데 ‘광대 줄타기’는 ‘삼현육각’을 갖추어 염불, 타령, 당악 등이 연주된다. 짧은 시간에 몇 가지 재미있는 ‘잣노릇’만 보여주는 ‘도막줄’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국의 줄타기가 아슬아슬한 재주에만 치중한다면 우리들의 전통적인 줄타기는 ‘악’, ‘가’, ‘무’를 곁들이 교예로서 특히 연극성이 우세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1) 김영철 님의 구술에 따른 ‘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1975)의 줄 구조 다음 줄타기의 승도보는 『무형 문화재 조사 보고서』제118호 김천홍, 정화영의 『줄타기(繩度)』(문화재관리국, 1975)의김영철 본을 참고, 정리한 것이다.
2) 김영철 님의 승도보
(1) 고전줄타기 | 장단 ; 염불 일박(一拍) 일보(一步)로 양 손을 좌우로 펴들고 줄을 타며 건너 간다.
(2) 뒤로 걸어가기 | 장단 ; 당악 줄 위에서 뒷걸음질을 하며 일박, 일보로 줄 끝까지 걸어간다.
(3) 앞,뒤로 종종 걸음 자진타령에 맞춰 (1)과 같이 자진걸음으로 건너간다.
(4) 서서 돌아서기 | 장단 ; 타령 작수목 앞에 와서 두 발 걸어가서 바른손의 부채를 가슴 앞으로 돌리며 180도 돌아선다.
(5) 앉아서 좌로 돌기 ①과 같이 줄 중앙 지점에 앉아서 ②와 같이 바른발을 앞으로 조금 대딛고 부채를 홱 앞에서 우로 돌려 치면서 ③과 같이 180도 돌아앉았다가 우로 180도 돌아앉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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