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서문을 대신하여, 알리에게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서문을 대신하여, 알리에게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주시드니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5.09.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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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나의 사랑하는 친구, 알리. 책을 여러 권 냈지만 아직도 원고 교정을 볼 때면 마음이 설레곤 해. 과연 이 글을 읽어줄 독자는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가 서점의 서가에 꽂힌 이 책을 꺼내 펼치는 순간 대화가 시작될 텐데, 그건 신입사원이면 누구나 겪는 인터뷰와 같다는데, 과연 내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네. 그러다가 끝내는 구제불능의 유혹에 빠져. 혹시 대박이 나서 출판사들로부터 출판 의뢰가 쇄도하는 건 아니야? 쿡쿡. 알리, 그럼 내 진하게 한 잔 쏠께.

그러나 알리, 내가 이 허무맹랑한 꿈에서 깬 지는 이미 오래야. 그도 그럴 것이 비평문이란 글의 성격상 미문이 허용되지 않잖아? 알리도 그건 알지? 될 수 있는 한 수식어를 줄이고 텍스트나 미술현상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서술하는 거, 그게 비평의 문체란 걸. 미술비평이랍시고 시작한 지 벌써 스무 해가 지났는데, 그래서 때로는 밤을 하얗게 밝힌 대가로 여섯 권의 책을 펴냈는데, 책이 잘 안 나가.

지금도 원고가 켜켜로 쌓여 한 열 권쯤 더 나올 만큼의 분량이 있는데, 책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뭐라고? 이 책을 내준 00출판사가 있지 않냐구? 그치. K사장, 완존 똥배짱. 그런 양반이 있으니깐 그나마 평론이 존속해. 명맥을 유지한다구. 그러니까 알리 내 말 잘 듣고, 앞으론 술만 퍼마시지 말고 책 좀 사봐. 책은 영혼의 양식이라잖아. 그 불룩 나온 술 배는 좀 줄이고, 영혼의 배를 좀 늘리라구. 까짓 만 오천 원쯤이야 안주 한 접시밖에 안되잖아? 이 책에서 단 한 구절만 건져도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구. 그러니 투자해 어서, 내 말 믿구.

너 허풍장이 알리, 넌 내 친구지만, 미국에도 허풍장이 알리가 있지? 무하마드 알리, 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세기의 복서. 그 사람 지금도 살아있지? 아님 벌써 죽었나? 잘 모르겠네. 하지만 그 양반이 명언을 남겼지. “상상력이 없는 자는 날개도 없다”고. 어쩜, 미국의 운동선수는 참 세련됐네. 이 땅의 정치가들보다도 한 수 위야.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 하면 경제가 안정돼서 내 책도 좀 팔리고 할 텐데, 지금 이대로는 싹수가 노래. 영 날샜다구. 그러니 내가 뭘 기대하겠어? 알리.

그나저나 “상상력이 없으면 날개도 없다”는 알리의 말은 참 곱씹을수록 명언이야. 왜냐면 예술에서 상상력은 곧 날개거든. 근데 요즘엔 상상력도 없는 사람들이 예술을 한다고 덤벼. 알리, 예술이 그렇게 만만한 거야? 그래? 그런 거야?

하긴, 평론도 상상력이 필요하긴 해. 그냥 이론에 작품을 마구잡이로 대입해선 안 된다구. 왜냐면 평론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 그건 요리야. 아주 품격높은 쿠킹이지. 작품은 살아서 팔팔 뛰는 생선과도 같아. 그 생선의 날카로운 지느러미에 손을 베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생선에 대해 잘 알아야 해. 생선에 대해 잘 모르는 요리사는 언젠간 그 놈 때문에 몸을 다쳐. 그럼 이 바닥에서 영원히 아웃이라구.

알리, 이 책은 본격적인 평론서가 아니야.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저기에 기고한 글들을 좀 모으고, 몇 편은 새로 썼지. 그리고 또 하나. 수필도 좀 추가했어. 이게 수필 축에나 드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요샌 날고 기는 수필가가 너무 많으니깐.

그래도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걸 전면에 배치했어.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읽어봐 줘. 그리고 재미있으면 계산대로 가. 알리는 영원한 내 친구잖아,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