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중강 문화비평가 / 공연기획자]“동시대성 느낄 수 있으면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하고 싶어” ①
[인터뷰 윤중강 문화비평가 / 공연기획자]“동시대성 느낄 수 있으면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하고 싶어” ①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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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제자라는 도제 머무르면 교수 작품밖에 나오지 않아, 국악계 성골과 진골 구분 극복해야
▲자신을 르네상스인, 선비라 불러달라고 하는 윤중강 문화비평가이자 공연기획자, 예술감독.

기자는 그동안 ‘윤중강’이라는 이름을 대할 때마다 국악계에서 잘 나가는 ‘갑’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기 잘난 맛에 우쭐대고 다니는,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밥맛’이었다고나할까? 공연장에서나 여느 행사장에서 가끔 마주쳐도 예전에 인사 한 번 나눴던 기억이 있는지라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얼마 전 전통연희와 관련된 한 세미나의 발제자로 참여한 그와 조우했다. 그 날을 계기로 비로소 그를 탐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약속을 한 후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우리나라 최고 학부라는 제도권인 '서울대'를 졸업했고 국악계뿐만 아니라 공연현장을 종횡무진 하고 있는 그는 평론가로 방송진행자로, 기획자로, 예술감독으로서 그 누구보다 주류 중에 주류라고 여겨진다.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은 항상 마이너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국악계와 관련된 글의 80%가 그의 글이라고 할 만큼 그는 평론가로서 국악공연 현장을 부지런히 누비고 성실히 글을 써냈다”라고 한 어느 국악인의 글 한 토막에서만 봐도 그가 국악계에서 얼마나 활발한 활동을 하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는 서울대 국악과를 가야금 전공으로 들어갔지만 연주만을 위해 공간에 갇혀있는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했다. 지금도 여전히 ‘호기심 천국’인 그는 어디든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자극시키는 현장으로 열심히 돌아 다녔다. 그러면서도 최고성적으로 졸업했단다.

현장을 다니다 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현장에서 자신이 판단한 부분으로 간섭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찌감치 학부생 때 우리나라 국악평론가 1호로 등단한다. 모두들 황병기 가야금명인의 이력에만 관심을 둘 때 그는 최초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작품론과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다룬 평론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비평은 초기엔 혹독했다. 명인들의 작품과 공연에도 가차없이 칼질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평론가의 칼은 생명을 살리는 의사의 집도와 같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밤도 낮도 들썩들썩>이라는 ‘밤샘콘서트’ 등 여러 독특한 연희판을 기획하고 예술감독을 거치며, 오는 24일(*23일 발행된 오프라인 신문 기준 일자 -편집자 주)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릴 '오천(午天)의 판소리' 첫무대인 <모노판소리-심청의 재구성>준비에 한창이다.

이렇 듯 그는 국악계에 깊이 관여하고 판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르네상스인, 선비’라고 답했다. 그 자신이 ‘국악문예부흥’의 중심이라는 말로 풀이된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가져가야할 것으로 국악을 중심축으로 아리랑과 가야금 ·소리를 꼽았다. 여기서 좀 더 확장해 아시아와 연희, 만요, 1930년대 등에 천착한다.

그리고 우리 국악발전을 위해서 국악창작이 많이 나와야한다는 것, 국악 작곡가들의 분발, 국악기의 개발을 강조한다. 어디서든 그는 머뭇거림과 거침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그 모든 일들을 허투루 하지 않고 예리하게 핵심을 파악하고 주변부를 두루 꿴다. 가을이 들어서는 길목에 김영갑 10주기 추모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트에서 만났다.

            마이너리티와 메이저리티 사이에 선 경계인, 윤중강.
 ‘서울대’에서 국악을 공부했고, 그 누구보다 국악 현장에서 많이, 오래 머물렀다.
          국악 변혁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는
 여전히 ‘음악계의 마이너인 국악계’에서도 ‘마이너’에 위치하고 있다고 자조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엉뚱함과 성실함, 집념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다.

▲자신을 르네상스인, 선비라 불러달라고 하는 윤중강 문화비평가이자 공연기획자, 예술감독.

음악계에서 국악이 마이너라고 규정했고, 그 국악에 천착하고 있는 자신을 여러 과정에서 ‘마이너’라고 규정한 글을 봤다. 사실 상당히 놀라웠는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나.
“여러 예술감독을 거쳤음에도 그렇다. 지원서를 잘쓰지 않는 스타일인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원한 적이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잘 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갖고 지휘자 없이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윤중강은 평론가인데 평론가가 예술감독을 맡을 수 없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이 때 국악계에서도 마이너라는 걸 실감했다.”

답변을 듣고 보니 마이너리티라기보다는 ‘경계인’이다.
“그게 적절한 거 같다. 이쪽에서 보면 이쪽으로 맞고, 저쪽으로 보아도 저쪽에 맞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안에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거다. 아는 후배가‘ 형은 필드가 있다고 좋아하지만 형에게 역할을 일임하지 않으면 형은 잘 사는 게 아냐’라는 충고를 한 적이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충고였다.

아는 기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아티스트가 아니에요’하더라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국악계에서 변혁의 주체가 되어 오지 않았느냐. 나 때문에 이런 점들이 달라지지 않았니. 변화의 지점에는 다 내가 있었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기자는 ‘그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선생님을 아티스트로 보지 않아요. 만일 선생님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왔다면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피곤하고 극장장은 극장장대로 피곤해져요’라고 반박하더라.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게 현실이구나하는 자괴감이 생겨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떻게해야 메이저의 반열에 오른다고 생각하는가.
"국악계에서 동시대성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면 윤중강이 메이저가 되지 않을까.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현 국악계의 기득권인 서울대 출신이라든가, 국악예술학교 출신이라든가 하는 성골과 진골의 구분을 극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출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인다.
“내 스타일을 끈질기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작년에 서울시 관현악단 창단 50주년 작품으로 ‘금시조’를 한 적이 있다. 공연을 마치고 난 다음 생각한 게 내 뜻대로 한 게 아닌데, 내 뜻대로 하지 않은 것도 아닌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부산에서 열린 공연은 너무 내 뜻대로만 했다. 본 것은 많은데 돌아가는 프로세서를 몰랐을 때 연출한 공연이기도 했다. 내 스타일은 아날로그 방식을 추구한다. 1인극이나 2-3인이 출연하는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투자를 하는 공연을 올리고 싶다. 소외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쉽게 대중적으로 가면서도, 노래 중심으로 연출하고 싶다.”

▲자신을 르네상스인, 선비라 불러달라고 하는 윤중강 문화비평가이자 공연기획자, 예술감독.

많은 국악 작곡가... 3년 반짝였다가 5년을 울궈 먹고 10년이 되면 지겨워서 못 들어

국악 작곡가의 자기 복제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서양 악기 연주자에 비해 국악 연주자들은 악기의 스킬에 비해 자기 노력을 많이 들여서 연주 능력을 향상시킨다. 하지만 국악 작곡가들은 전통적인 국악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한다. 서양음악에 대해서도 대학생 수준의 기초적인 지식을 가졌다. 서양 음악의 여러 흐름을 알아서 국악에 접목할 수도 있기에, 서양음악의 경향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옳다. 국악 작곡가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서라면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옳다.어떤 분은 전통적인 방식의 작곡 방식이 전부다. 또 다른 분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작곡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기는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많은 국악 작곡가가 3년 반짝였다가 5년을 울궈 먹고, 10년이 되면 지겨워서 듣지 못한다. 곡을 의뢰받으면 자신의 창작곡을 팔아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심지어는 중간에 과거에 만든 작품을 끼워넣는 ‘끼워팔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양심상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젊은이를 중심으로 전통연희 발전해야”

얼마전 ‘전통연희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대표 브랜드 공연예술 작품개발의 실천적 방안 모색’ 세미나에 패널로 참석했다. 당시 발제자로서 ‘풍물’과 ‘학교’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 달라.
“국립연희단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었다. 만일 국립연희단이 만들어졌다면 그 안에 포함된 단원은 잘 살 수 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했던 작품이나 풍물 중심의 작품을 가져와서 레퍼토리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연희를 활성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본다. 문화계에서는 ‘우리가 국립연희단을 지원해 줌으로 연희 분야를 지원해 주었다. 연
희를 못 만드는 건 연희를 만드는 당신들이 잘못이다’라고 이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요즘 젊은이들의 아이디어는 굉장하다. 교수-제자의 입장에 서면 교수가 하라는 대로만 작품이 나온다. 하지만 학교라는 제도를 떠나 수평적인 발상으로 젊은이들을 대하면 평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연희의 아이디어로 연극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고, 전통예술원이나 국악에서 작곡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새로운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아이디어가 쌓이고 쌓이
면 전통연희가 보유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해질 수 있다. 이런 걸 만들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연희단을 만들면 좋은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연희단이조직화되면연희단을조직하고운영하는것에 공적 자금이 지원된다. 이렇게 될 때 문제는 전통연희를 하는 다른 소규모 민간단체의 지원이 끊길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국립연희단이 전통연희의 중심이 되면 예전에 성공했던 레퍼토리에 연연하기 쉽다. 레퍼토리지 경향이 달라진 지금에 와서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풍물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백조의 호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발레리나가 이미 익힌 동작을 가지고 조합하고 응용해서 발레 작품이 나온다. 하지만 전통연희를 하는 분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풍물을 집어넣는다는 점이다. 풍물은 전통연희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
아야 한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논리적으로 예술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때에 풍물을 집어넣고 흥겹게 만들면 관객이 흥겨워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자신을 르네상스인, 선비라 불러달라고 하는 윤중강 문화비평가이자 공연기획자, 예술감독.

1930년대라는 근대에 관심이 많다. 왜 그 시기에 주목하는가.
“1910년과 20년대에는 독립에 대한 갈망이 컸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 독립에 대해 체념한 상태다. 단군 이래 지금까지 1930년대 사람들만큼 도제나 집단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이 때 분들은 사고도 자유로웠다. 우리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일본보다 똑똑한 분들이 많았다. ‘1930년대 분들이 재림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안에 홍난파가 있고, 김우진이 있고, 김해송이 있다.”

아리랑은 디아스포라와 연관 깊어

평생 가져갈 소중한 세가지 중에 가장 먼저 아리랑을 꼽았다.
“서울대학교 신용화 교수에 따르면 아리랑은 ‘아리땁다’는 뜻과, ‘아리다 쓰리다’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이리랑은 ‘아리’와 ‘랑’이 결합했다. ‘랑’은 젊은이를 일컫는데 아리랑의 분위기를 보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맞다. 이렇게 보면 아리랑은 아리따운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젊은 여자의 아프고 쓰린 이야기를 그리는 과거 역사다.

일본에는 ‘사쿠라’ 중국에는 ‘모리화’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자체가 정체성을 갖는다. 이탈리아의 나폴리음악이 이탈리아 민요의 정체성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아리랑이 너무많다. 다른 나라의 노래들은 민요로 끝나는데, 한국의 아리랑은 새로운 계기가 주어지면 기존의 아리랑과는 다른 형태의 아리랑이 만들어진다.

IMF때만 하더라도 ‘98아리랑’이라는 것이 선보이지 않았는가. 2002년월드컵 때에는 아리랑을 가지고 응원가를 만들기까지 했다. ‘디아스포라’와 아리랑 역시 깊은 연관을 갖는다. 다른 나라의 디아스포라는 모리화 같은 자신들의 고유한 민요를 부른다. 하지만 외국에 사는 한국의 디아스포라는 오리지널 아리랑도 부르지만 그 지역의 정서와 결합해 새로운 아리랑을 만든다. 예를 들어 사할린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아리랑을 부르면 ‘사할린 아리랑’이 만들어진다. 2012년 아리랑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첫째 날의 ‘아리랑이 웃는다’, 둘째 날의 ‘아리랑에 안기다’ 같은 레퍼토리는 아리랑을 인격체처럼 대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을 슬픔과 한의 정서로 대한 것이 아니라 아리랑을 여자친구, 현재성으로 다룬 결과물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겨야 장르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예를 들면 김연아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장르에 관심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입장에서 나운규에 대한 아리랑 작품을 만들어보는 게 소원이다. 최근 연출한 작품 가운데 15-20분 동안 나운규 아리랑
을 기획한 적이 있다. 나운규를 파고드는 게 중요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54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정리 박정환 칼럼니스트 press@sctoday.co.kr

오프라인 서울문화투데이 Culture interview 2015년 9월 23일자 3면